한 때
나름 시에 진심이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 권의 시집을 선정해 함께 읽었다. 시집을 보다가 좋은 시를 발견하면 소중한 것인 양 모퉁이를 접곤 했다. 그렇게 접힌 모퉁이에서 다시 두세 편을 골라 모임에서 낭송했다. 아주 가끔은 내가 쓴 시를 가져가기도 했다. 시를 읽다가 문득 쓰고 싶단 근자감(?)이 들 때, 끄적거린 것을 창작시랍시고 용감하게 내보인 것이다. 얕기만 한 문학적 밑천이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지만, 시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은 결과물도 만들었다. 모임원들이 추천한 시들을 묶어 추천시집이라며 제본하기도 했고, 부족하지만 용감한 창작시들을 모아 공동 시집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첫째나 둘째 아이를 낳고, 쌓이는 연차만큼이나 늘어나는 직장 업무로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이 차츰 줄었다. 적은 인원으로 모임을 진행하기가 어려워 일정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보니 하는 듯 마는 듯 흐지부지되었고, 그런 상태로 내버려 둘 수 없어 결국 모임을 해체하고 말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아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들은 문장 사이의 쉼표 같은 것이었다. 문장을 이어가기 위해 꼭 쉬어야 할 숨이었는데, 문장만 생각하느라 정작 숨을 잊은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쉼표 없는 문장으로 살았다.
5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읽을 시집을 추천해 달라는 아내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내가 시집을 본다거나, 아내에게 추천할 시집이 없어서 놀란 게 아니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질문에 시를 잊은 채 살아온, 시간의 간극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시를 읽고, 시집을 사 모았던 게 맞는지, 모임에 나가 시를 낭송하고, 창작시를 쓰고 시집을 냈던 게 정말 내가 맞나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나 오랫동안 시를 외면하고선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집을 추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의문에 부끄럼이 겹치던 순간, 오래된 기억 저 편에서 모퉁이를 가장 많이 접은 시집이 떠올랐다. 웬 절창이 이리도 많냐는 고은 시인의 추천의 글도 함께 기억났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다 잊은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속마음을 숨긴 채, 태연히 시집을 찾아 아내에게 건넸다.
그날 이후
다시 시집을 들었다. 오랫동안 잊은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시를 향한 열망을 다시 끌어내고픈 마음 때문인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아내에게 건넨 시집을 아내가 아닌, 내가 읽고 있다. 시를 통해 작가의 깊은 관찰과 사색, 그리고 남다른 표현에 감탄하고 공감하는 일은 여전히 삶의 기쁨이다. 그것과 함께 오래전 모퉁이를 접을 당시의 나를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즐겁다. 남이 추천한 모퉁이까지만 읽으려 했는데, 결국 시집 전부를 다 읽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시집을 찾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나만 읽고 느끼는 ‘행복’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모퉁이 시 한 편 소개한다. 브런치 독자님이 눈앞에 있진 않지만, 시모임을 하던 그때처럼 낭송하는 기분으로 찬찬히 적어본다.
행복
이대흠
삶은 빨래 너는데
치아 고른 당신의 미소 같은
햇살 오셨다
감잎처럼 순한 귀를 가진
당신 생각에
내 마음에
연둣물이 들었다
대숲과 솔숲은
막 빚은 공기를 듬뿍 주시고
찻잎 같은 새소리를
덤으로 주셨다
찻잎이 붕어 눈알처럼
씌룽씌룽 끓고
당신이 가져다 준
황차도 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