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ecil Apr 04. 2021

끈기의 다른 이름, 열정.

 대학 시절 친구들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는 '너는 열정이 없냐.'였다. 다들 신나서 다닌다는 나이트는 너무나 시끄럽고 어수선해서 한 번 가보곤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연애도 시큰둥, 특별히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열광적으로 빠져서 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열정이 없고 감정 기복이 없어서 사이보그 설이 돌았던 적도 있었으니 '열정'은 그냥 포기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가져보려 하지 않았으니 포기의 대상도 아니고 그저 그냥 관심 없는'남의 것' 정도였다. 

  지금의 남편과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우리의 연애에 조건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남들 다 하는 100일, 1000일 이런 기념일 진짜 하지 말자, 자신 없다.' 남자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여자인 내가 꺼낸 말이다. 살짝 황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본인도 귀찮을 거 같았는지 이내 수긍하고 무난하게 연애하고 요란한 청혼 이벤트 없이 결혼식도 하고 아들 하나 낳아서 무난하게 잘 살고 있는 편이다. 

 공부, 일, 연애, 육아 모든 것이 무난하게 지속되고 있을 뿐 '열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숨을 쉴 공간은 없어 보이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남들 한번쯤 가져본다는 그 열정이 진실로 나에게만은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열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열정의 유무를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열정'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다. 

  한자로 熱情(더울 열/뜻 정)은 데워진 뜻, 뜨거운 뜻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어떤 것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는 뜻인데 그 뜨겁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물의 온도를 높여보면 따뜻함을 느끼는 온도는 개인차가 있으므로 뜻을 뜨겁게 하는 정도에도 개인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열정은 명확하게 75도 정도의 온도로 데워진 상태가 겉으로 드러나는 의지'라는 정의는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은 약 65도 정도의 뜨거움을 느끼는 온도의 의지를 겉으로 드러내야 열정인데 어떤 사람은 40도 정도의 체온보다 약간 따뜻한 정도의 자기만의 온도로 맞춰진 의지만으로도 열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의적 해석만 써놓다 보니 자기변호적인 느낌이 강해서 이번에는 열정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그 뜻을 찾아보기로 했다. 영어 단어  'enthusiasm'은 본래 그리스어에서 온 표현으로 '안에(in)'라는 뜻의 접두어'en'

과 '신(god)'이라는 뜻의 'theos'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열정이란 '내 안의 신'이라는 뜻으로 '광신적인 믿음', '견고한 자기만의 신념'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고 한다. 한자어 표현의 주관적인 따뜻함의 온도가 높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열정과 '광신적인 믿음'이 합해진 형태의 열정이 어쩌면 우리가 주로 '열정적'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보편적 의미라고 본다면 나는 '열정'이 애초부터 없는 사람이 맞다. 

  그러나 다행히도 열정의 온도는 그 어디에도 정의된 바가 없고 내 안의 신은 광신적일 수도 있지만 견고한 자기만의 신념일 수도 있으므로 '견고한 신념을 가지고 은근하게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는 의지'라는 측면에서의 열정도 존재할 수 있다. 물론 보편적인 열정의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겠지만 이 또한 열정의 또 다른 얼굴임을 인정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매우 열정적인 인간일 수 있다. 

  그렇게까지 본인이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남들 다 있다는 것이 없다니 일종의 오기가 생겼다고 해두자. 어릴 적부터 무난하고 무탈한 감정을 가지고 살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시작은 어렵지만 일단 마음을 먹었다면 끝내 해내버리는 끈기 하나만큼은 남다른 편이었다. 그저 겉으로 '가즈아!'라고 소리치고 동분서주하지 않았을 뿐이다. 남편도 처음 사귄 남자 친구였고, 직업도 17년을 이어오고 있으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로 마음먹은 뒤로는 단 하루도 늦잠을 잔 적이 없고,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으면 그냥 계속 읽는다. 잘 안되면 또 해보는 것만큼은 정말 자신 있으니 이 정도면 끓어 넘치는 열정은 아니어도 약 35도 정도의 밍 큰 한 보온 상태로 만드는 그릭 요구르트 수준의 꾸준한 열정은 차고 넘치는 사람이니 나도 열정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성공은 실패에서 실패로 열정적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연속에서 이루어진다.
 -윈스턴 처칠-

 

 '열정적이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괜찮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도 스스로의 열정적이지 않음에 알게 모르게 비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열정적인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열정 신화 때문에 더 스스로를 자학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우리 함께 열정의 다른 얼굴과도 친해져 보자. 윈스턴 처칠의 명언을 곱씹어 보면 실패에서 실패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끈기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불타오르고 신들린 듯 일을 시작하지만 한번 실패에 좌절하고 포기한다면 그 열정은 진짜가 아니다. 진짜 열정은 실패 따위에 굴하지 않고 다음 실패로 신나게 전진하는 끈기의 힘이다. 불타오르는 열정이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태생적으로 파이팅이 넘치지 않아도 '끈기'만큼은 '꾸준함'만큼은 자신 있다면 당신은 지구 최강의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오늘도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모든 '열정인'들! 파이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