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40대를 '불혹(不惑)'이라고 한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유혹에 강한 편'이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나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일들로부터 더 이상 유혹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는 나이라고 해야 더 맞을 듯하다. 특별히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40이 넘으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의 수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에는 인생이 정말 길어서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답답하고 지루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들은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40대가 시작된지도 몇 해가 더 흘러보니, 전혀 다른 일들로부터의 유혹보다 '하지 않았던 선택들'에 대한 유혹들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한다.
그냥 밀어붙였다면, 그때 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
첫 번째 선택의 순간은 유난히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중학교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음 실력이 좋았던 그때, 작곡을 전공하시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던 아버지는 그 시절 나의 재능은 천재적 재능이 아니라 그냥 남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소위 말하는 '팩폭'을 날리셨다. 클래식부터 하드락까지 음악이라면 정신줄을 놓았던 그 시절,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모차르트, 베토벤에 머물러 있던 아버지의 고정관념과 꿈꾸는 방법을 전혀 몰랐던 나의 무지함으로 시작조차 해 보지 못하고 방향을 틀었다. 끊임없이 예고 진학을 말씀하셨던 중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의 아쉬움 가득한 눈빛이 가끔 떠오르곤 한다. 그때, 해보겠다고, 학비 따위 내가 벌겠다고, 가출을 불사하고 부모와 싸워 이겨 음악을 했더라면 유명한 가수들에게 곡을 주는 사람이 되었지 않았을까? 미련이 남으나, 다시 돌아간다 해도 아마도 그럴 용기가 없었을 터, 게다가 중3 봄에 우리 가족은 모두 일본에 잠시 머물러야 했으므로 스쳐간 미지의 세계일 뿐.
두 번째 선택의 순간은 바로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다. 부친의 해외 발령으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본 거주가 시작되었다. 중3 때 처음으로 일본 글자를 배웠고, 일본 현지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유난히 일본 고전에 재능을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있는 고려가요, 속미인곡, 사미인곡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되는데, 여하튼 희한하게 이 과목에서 독보적인 두각을 나타냈다. 모국어가 일본어인 토종 일본 아이들 틈에서 흔들림 없는 만점을 받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제안을 하셨다. 일본에서 고전으로 박사를 받아보면 어떻겠냐고. 당시 나의 꿈은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말로 대화하고, 한국말이 나오는 TV를 보는 것이었으므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던 내가 그 답답한 일본 고전을 연구하기 위해 혼자 일본에 남아있을 리 없겠지만 가끔 기억에 남아 있는 일본 고전 시구들이 떠오를 때면 '그때 일본에 남아 있었다면?'이라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미련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상상 정도로 남겨두기로 하자.
마지막 사건은 아이를 낳을 즈음해서 선택한 사회생활이다. 일을 10년 넘게 해오면서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은 없었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일에 대한 권태로움을 느낄 여유도 없었고, 매일이 정신없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다른 생각, 다른 길을 생각할 여력 따위는 사치였을 정도로 바쁜 일상을 살아내던 그 순간, 코로나가 시작되고 집에 머물며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역사에 'if'는 없다
역사에만 'if'가 없겠는가? 우리 인생도 한 사람의 역사이니, 과거를 떠올리며 '그때 그 시절, 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지금의 선택, 지나온 길에 대한 회한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과거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이 동경으로 바뀔수록 우울의 늪에 빠지게 되니 주의가 필요하다. 다만, 불혹을 훌쩍 넘어서 있는 이 여기, 이 순간에 인생의 새로운 '유혹'에 넘어가 보기로 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순간은 불안하고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매 순간 좌절하지만, 환갑을 넘긴 나이에 '미련'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한 발 내디뎌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