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유재석 씨가 출연했던 예능 중에 '일로 만난 사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친분이 있는 지인 연예인들과 하루 동안 극한 직업 체험을 하는 예능이었다. 그야말로 '일'로만 만나자는 취지의 내용. 프로그램의 재미나 내용의 흥행 정도를 떠나서 그 제목이 너무나 끌린다. '일로 만난 사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이다.
직업을 고를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일단 인간관계가 질척거리는가 하는 부분이다. 직장 내 혹은 일을 하면서 시시콜콜 서로에 대해 깊이 알아가야 하는 분위기가 있는 곳은 연봉이 크고 작음을 떠나 손절이었다. 기질적으로 원래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유난히 관계가 꼬이거나 나의 사생활에 훅 들어오는 질문을 받는 것을 진절머리 치도록 싫어하는 나는 일단 회식이 많고 서로의 모임이 잦은 집단에 들어가면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단합대회라고 하는 모임도 사실은 콩가루 대회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건 결국 단합대회가 끝나면 좋았던 사이도 작은 사건으로 틀어지고 이 사람 말을 저 사람이 옮기고 과도한 음주로 말싸움에 몸싸움도 일어나고 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그 술이 원수가 맞다. 술을 진탕 마시는 관계들은 결국 그 말로가 안 좋다. 요즘 20대들은 그런 분위기를 싫어해서 사실 젊은 친구들과 일할 때는 진정한 '일로 만난 사이'를 추구할 수 있다. 일로 만났을 때는 일을 하면 되는데 거기에 사사로운 감정을 섞으면 왕따도 생기고 뒷말도 생기고 뒤탈이 너무나도 많다.
일로 만난 사이끼리 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는 바로 여행을 떠나는 것. 업무상 좋은 결과가 나와 보상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각종 산해진미에 엄청난 대우를 받으며 여행을 다닐 때는 그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들과 둘이서 개고생을 하며 다닌 유럽 여행이 인생 최고의 여행이 되었던 걸 보면 '일로 만난 사이'와는 그냥 일만 해야 하는 게 맞다.
나는 지극히 가족 중심주의이고 사람과 깊어지는 데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걸린다. 서로 비슷한 기질끼리 끌어당긴다는 원칙에 따라 내 주위에도 그런 부류들이 많아서 서로 넘지 말아야 할 강을 지켜두고 만난다. 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지켜주고 따로 또 같이 하는 관계의 건강함은 오히려 그놈의 '정'을 운운하다 사고를 촉발하는 끈적한 관계보다 훨씬 오래가고 진실된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이기적인 것'이라고 손가락질받을 게 뻔하므로 자기 방어를 해보자.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깊어지고 무르익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스며들 듯 친해지고 알아가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건강한 관계들이 하나둘씩 모여 진정한 '내 사람들'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일하며 만났어도 시간이 지나고 함께 한 세월이 길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들이 누적되면 진짜 사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급하게 팀워크를 만든다는 미명으로 술을 나눠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단합의 구호를 외치고 같은 유니폼을 입고 물리적인 강요를 한다고 관계의 친밀도가 오를 리 없다.
좋은 술은 오래 익혀야 그 가치가 오르고 명품도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몸 값이 뛰듯이 사람과의 관계도 요리조리 보고 익히고 부대끼는 시간들의 누적에서 나오는 가치들이 있다. 그 가치들을 무시하고 '우리는 한 팀'이라며 관계의 깊이를 무조건 강요하는 한 '일로 만난 사이'는 '일만 하는 사이'로 변질될 수 있다.
'일로 만난 사이'는 어쩌면 '그야말로 찐 관계'와 '일만 하는 사이' 사이에 중심을 잡고 있는 축 같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의 깊이는 긍정적 시간의 누적과 비례한다는 기본 생각에 입각해 팀워크를 키워간다면 '일로 만난 사이'도 나름의 매력이 생기지 않을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