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기
짙게 물들었던 화려한 가을 단풍도 지고 단조로운 색으로 채워가던 어느 날, 아파트 단지 외벽 도색이 시작되었다. 시대의 유행인가,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 대세를 따라 브랜드 고유색인 주황색은 지워지고 외벽 대부분에 검정만큼 짙은 네이비색이 칠해졌다. 카드섹션처럼 한 동씩 도색 작업이 완성될 수록 어두운 색들이 더 눈에 들어오니 예전과 달라진 단지 분위기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보수 공사로 페인트칠 다시 하는 건 좋은 데 왜 색까지 확 바꿔야 하는 건지. “야근하고 밤늦게 들어올 때 보면 단지가 더 어두컴컴해 보일 거 같아. 난 원래가 훨씬 나은데.” 나의 불만스런 말에 부녀는 의견을 달리 한다. “깔끔해 보여서 난 괜찮던데.” “맞아 아빠, 나도!” “왜~ 산뜻한 오렌지색이 더 예쁘잖아?” 아이에게라도 공감을 얻고 싶어 색깔 표현을 얹어본다. “그래도 어두운 색이 고급스러워 보이고 더 좋아.” 요즘 부쩍 ‘고급’을 자주 사용하는 ‘고급’예찬론자 아이에게, ‘네가 고급이 뭔지 알긴 알아?’ 하고 쏘아붙이고 싶다. 평소 눈에 띄는 색보단 채도 낮은 색을 선호하는 나인데 아파트 외벽의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나 변화를 만나면 나는 유독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회사 업무나 아이 학사일정이 변경되면 나는 생존본능처럼 모든 촉을 세우고 경우의 수를 나열하며 계획안 1.2.3…을 적는다. 머리 속에서 수 차례 시뮬레이션 후 최종안이 선택되면 그 다음은 익숙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정해진 순서와 계획은 날 가두는 갑갑한 틀이 아니다. 나를 지켜주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최소한의 울타리이다. 일년 내내 몸무게에 큰 변화가 없다지만 2월이 되면 살이 빠지고, 감기 한 번 앓지 않는 내가 일 년에 한 번 3월초쯤 심한 몸살을 앓는다. 인생 선배(여성)들 말씀에 따르면 신기하게 매년 출산한 때가 오면 열병처럼 몸이 아픈 거라고. ‘아, 3월 5일에 출산했으니 정말 그런가’ 했지만 생각해보면 아이의 새 학년 시작이 더 큰 요인이었다. 변경된 학원 시간표, 동선 변화에 따라 조율하고 수정해야 할 내 몫의 선택들로 2월말-3월초를 보내고 긴장이 풀리면 ‘띵동! 나 이제 좀 들어가도 되니?’하며 몸살이 날 찾아오는 거다.
익숙함은 머리보다 손발과 친하다.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몸을 움직이게 한다. 출퇴근하며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 4호선 평촌역 7-1칸에서 승차하여 2개 역을 지나 환승역 금정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면 바로 앞이 계단이다. 건너편 승강장으로 바삐 오르고 내려가 4-2칸에 서서 1호선 상행선 열차를 타고 7개 역을 지나 문이 열리면 역시나 가산디지털단지역을 빠져나가는 계단이 바로 앞에 있다. 지하철 도어 번호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내 몸, 두 발의 기억만으로 매일 동선을 최소화한 효율적인 출근을 한다. 이른 아침 대부분 비어있는 마을버스에서 나만의 지정 자리에 앉아 남은 졸음을 쫓고, 10분은 커피를 들고 걷는 수고에도 내 입맛의 모닝 카페라떼를 위해 회사 건물이 아닌 단골 카페에서 매일 take-out 한다.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좋아했다. 요즘엔 ‘스며들다’를 활용한 ‘ㅡ며들다’라는 말이 신조어처럼 많이 들린다. 자기도 모르게 어떤 대상의 매력에 빠져들 때 쓰는데, 나의 일부가 된 듯 시나브로 익숙하게 스며드는 그 느낌이 좋다. 새로운 변화 앞에서 머뭇거리다 좋은 기회를 놓쳤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정한 패턴과 리듬을 반복하며 성실히 내 하루를 채우고 안전한 방식으로 내 삶을 사랑하고 있다. 나에게 ‘익숙해지기’는 평온한 삶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그새 익숙해진 걸까? 지난 주보다 오늘 본 아파트 외벽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그래, 깔끔해 보이는 거 같다.
December 04,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