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좋아하는 ‘핑크 하늘’이 찾아온 주말 저녁이다. 침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옅게 번지는 핑크빛 노을을 멍하니 한참을 바라본다. ‘벌써 7시네. 저녁 준비해야지.’ 독서를 핑계로 침대에 누워있다 남은 미련과 귀찮음을 이불 속 깊숙이 찔러 두고 가볍게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온다. 통유리창 너머 가득 찬 풍경은 가까운 모락산부터 멀게는 청계산 주변까지 전부 분홍으로 물든 하늘이다. 아파트 고층 흰색 외벽에 미처 하늘로 달아나지 못한 노을이 묻어 있다. 아니, 저 위에서 내 눈 가까이 내려온 거겠네. 저녁을 차리는 동안 금세 어둠으로 바뀌고 수도권제1순환 고속도로의 가로등이 길게 걸어놓은 조명처럼 이어지며 반짝인다. 저 멀리 고속도로와 해오고개를 달리는 차들의 전조등 불빛에 맞춰 내 눈이 같은 속도로 깜박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몇 분이지만 ‘고양이 눈키스’ 같은 느긋한 시선으로 좋아하는 야경과 눈맞춤하니 나도 모르게 애정 어린 미소가 지어진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공인중개사 사장님은 24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부터 전망이 좋은 집임을 강조했다.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거실과 침실을 앞서 오가며 창밖 트인 전망에 “어머, 정말~” 감탄사를 섞으며 우리의 반응을 살폈다. 생애 다섯 번째 집 계약을 앞둔 경력자인 우리 부부가 필수 우선 확인사항을 모를 리 없는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전망 좋다는 집에 5년째 살고 있지만 아침 6시 30분 집을 나서 저녁 7시에 돌아오는 일상에서 얇은 커튼 뒤 숨겨진 장점은 자연스레 잊혀졌다. 출근 준비로 분주한 새벽, 아직 조명을 켜지 않은 거실에 주황색이 번지고 있었다. ‘뭐지?’ 내내 쳐져 있는 거실 커튼을 열자 창 한가운데 다홍빛 해가 정수리부터 솟아오르는 걸 처음 본 날이었다. 해가 두 개일 리 없으니 지금 선명하게 보이는 게 일출이 분명 맞는데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낯설기만 했다. 정해진 출근 시간 덕에 같은 시간 떠오르는 아침 해를 관찰일기 쓰듯 한동안 휴대폰으로 열심히 찍었다. “오빠, 우리 집에서 일출 보이는 거 알아?” 똑같아 보이지만 모두 다른 날의 일출 사진 중 하나를 골라 남편에게 보낸다. “난 장인어른이 보내신 줄 알았네.” 기대 밖의, 놀림마저 잔뜩 묻은 듯한 답변에 혼자 삐치고 만다. ‘칫, 됐네요.’ 유난히 노을이 예쁜, 운 좋게 무지개가 정면에 걸려있는, 파란 하늘에 몽글한 구름이 그림처럼 떠가는 날에 옆에서 나보다 더 호들갑 떨며 손자국과 입김을 유리창에 가득 남기는 아이가 있으니 괜찮다.
주말 아침 달리기, 날이 좋아 심심한 공원 트랙보단 백운호수 코스를 선택하면 어김없이 호숫가 사진을 꼭 찍는다. 내 눈에 특별히 마음에 드는 구도가 있을 테니 역시나 늘 비슷한 풍경의 사진이 저장된다. 사진 한가운데 윤슬을 가득 담은 호수가 있고 가장자리 나무데크가 안정된 띠를 그리며 이어진다. 얕은 산이 호수를 백허그 하듯 빈틈없이 다정하게 둘러안고 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묶여 긴 줄을 서고 있는 오리보트도 보인다. 애정을 갖는 것에는 기꺼이 시간을 들이고 정돈된 시선을 주며 차곡차곡 기록을 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같은 일출, 호수로 보이지만 그곳에 있던 나에게는 때마다의 차이가 분명하다. 나의 웨딩스냅, 아이의 돌사진 수백 장 중 앨범에 들어갈 최종 컷을 선택할 때 쉽게 고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거다. “어떤 게 나아? 똑같아 보인다고? 잘 봐, 이게 어떻게 같아. 표정이 다 다르잖아. 모르겠어?”
짧은 숨만 내쉬는 바쁜 업무로 ‘4월아 빨리 지나가 버려라’, 모두가 예찬하는 지금의 봄날이 아쉽고 아까운 걸 모르고 지낸다. 여전히 거칠한 손에 꾸덕꾸덕한 핸드크림을 손바닥 체온으로 녹여 바르며 다짐한다. 흘려보내는 나의 일상을 붙잡아 바라보고 만져보려는 애정을 가져야 한다. 푸석한 마음만 가득한 나의 일상 속 ‘숨은 애정 찾기’ 게임을 해야겠다. “아, 벌써 일요일도 다 지났어.” 소파에 발바닥을 서로 댄 채 누워있던 아이의 귀여운 푸념이 들린다. “와, 그래도 지금 하늘은 진짜 예쁘다. 봐봐! 웬일이야” 말해놓고는 종종 아파트 상가에서 마주치는 공인중개사 사장님이 떠올라 멋쩍다. “맞아 엄마, 이건 진짜 꼭 찍어야 해.” 재빨리 자기 휴대폰을 가져와 다시 누운 자세로 하늘을 올려보며 마음에 들 때까지 사진을 찍는 아이 열정 덕에 민망함이 사라진다. 모든 순간이 감탄이고 애정의 대상인 아이의 분홍 마음이 유난히 부럽다.
April 09,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