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봄이 왔다며 요란한 4월이다. 아직 실감 못했다는 말은 여전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내 투정일 뿐이다. 목련이 터지고, 산수화가 노란 점을 찍더니 벚꽃마저 흰 꽃잎을 가득 피워 부는 바람에 꽃잎을 날린다. 봄이라 하니 달래, 냉이,,, 제철 나물까진 아니어도 비타민 무기질 풍부하다는 나물 반찬 몇 가지는 먹어야 할 거 같다. 코로나 탓에 기념일에도 외식을 꺼리게 된 일상에서 퇴근길 밀키트 매장에서 사 온 메뉴와 집반찬의 적당한 콜라보레이션으로 차린 저녁 식탁이 익숙하다. 밀키트에 채소 등 재료를 추가하고 별도의 조리를 한다지만 특유의 자극적인 맛은 어쩔 수 없다. 봄이 와서 살랑대는 마음만큼 내 입맛도 좀 가볍고 산뜻하게 해줘야겠지. 이런 생각을 읽힌 듯 때맞춰 건나물 판매 글이 눈에 들어온다. 종류도 다양하고 소포장이라 가격도 부담 없는, 무엇보다 국내산 말린 나물이다. 고사리, 애호박, 곤드레, 고구마줄기, 가지,,, 익숙한 나물로만 신중히 고른다. 곰취, 시래기는 왠지 낯설어 제외하고 난 손이 작으니 한 개씩만 골고루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틀 후 배송된 박스에는 색과 모양이 조금씩 다른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은 나물을 담은 작은 봉투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다.
식탁 조명이 꺼지는 9시 30분, 평소라면 주방 영업 종료지만 오늘은 연장 근무다. 나란히 세워놓은 건나물 포장 중 하나를 골라 뜯는다. 가장 많이 먹어본, 아이가 좋아하는 고사리나물 너로 정했다. 의욕적인 손동작이라 하기 민망할 만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15g 건고사리를 국그릇에 넣고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불린다. 샤워하고 나와 충분히 불렸을 고사리와 시계를 번갈아 보니 10시가 훌쩍 넘었다. 적당한 냄비에 한 줌의 고사리를 넣어 삶기 시작한다. 동봉된 조리방법을 보니 ‘30분 이상 충분히 삶아주세요.’ 1시간 가까이 불렸는데 불 위에서 30분이라고? 나의 놀람을 비웃듯 다음 과정은 무려 ‘뜸 들이기’다. 주말에 할 걸 뭐가 급하다고 이 밤에 시작했을까. 아직은 가늘고 딱딱한 형태로 끓는 물속에서 흔들리는 고사리를 바라보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끓기 시작한 냄비에서 비릿한 바다 향마저 난다. 난 분명 땅에서 자란 식물을 삶고 있는데 너 대체 정체가 뭐니? 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혼란과 의심이 냄새처럼 내 주위에 퍼져나간다.
작년 봄이 오기 전, 완도산 햇곰피 3KG 사건이 떠오른다. 산지 직송 갓 수확한 싱싱한 식재료가 1만 원대 저렴한 가격이라 3kg의 양은 헤아리질 못했다. 무거운 스티로폼 박스를 열고 질긴 김장봉투 안 담긴 것은 손질 안된 거대한 갈색 해초 더미였다. 바닷속 모습 그대로 한쪽 끝만 거칠게 묶여진 여러 다발의 곰피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다. 한 줄기씩만 꺼내도 싱크대 개수대안 한가득 곰피를 물로 씻고 냄비에 넣어 끓이는 작업을 반복했다. 집에서 크다 싶은 스테인리스용기와 냄비를 총동원한 햇곰피 데치기 작업을 세 시간이 넘게 계속하며 평온해야 할 주말 오후 온 집안과 내 몸에는 바다 냄새가 짙게 남았다. 2월 이때만 향긋한 햇곰피를 생으로, 해초쌈으로 즐길 수 있다는 말에 과감히 주문했지만 3인 가족에겐 맛보기가 아닌 일 년치 저장용이었다. 도마 위 넘치도록 긴 데친 곰피를 가지런히 모아 쌈 크기로 자르는 작업이 다음 과정이다. 각종 사이즈의 지퍼백 수십 장을 다 사용하여 차곡차곡 담은 곰피 3kg을 냉동실에 넣고 나서야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곰피 대습격’ 악몽을 꾸지 않길 바라며.
새벽에 찌르는 듯 쥐여 짜는 듯한 복통에 잠을 깬다. 4시 30분, 모닝 알람까지 한 시간은 더 남았지만 계속되는 복통에 잠을 못 들고 몸을 일으킨다. 왜 이러지, 건고사리 너냐? 중간에 다 삶아졌나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고사리를 먹어봤는데 덜 삶아진 듯 딱딱하여 몇 분 더 끓였었지. 아픈 배를 부여잡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휴대폰으로 ‘고사리 배탈’을 검색한다. ‘고사리는 독소가 있어 잘못 먹을 경우 구토와 복통이,,,’ ‘삶은 후 여러 번 물을 바꿔가며 씻어야 한다.’ 2번 씻은 게 부족했나? 불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으나 다시 시작된 쥐어짜는 복통과 어지러움으로 결국 도착역을 3개 남기고 내리고 만다. 플랫폼 의자에 웅크려 앉아 식은땀을 흘리며 진정되길 기다리느라 평소 1시간 10분 출근길이 2시간을 넘긴다. 병원 침대에 누워 혼자만의 확신에 차 복통의 원인을 어젯밤 건고사리와 끈질기게 연결 지으며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한다. 복부 곳곳을 적당한 압으로 누르며 진찰하던 의사는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다 긍정해 줄 수 없다는 듯 “장 기능 저하로 소화력이 떨어진 거 같네요. 피로나 스트레스 때문인지 가스도 많이 차있어요.”라는 진단과 함께 이틀 치 약을 처방한다. 갑작스러운 고통의 원인이 건강 체질인 내게 있을 리 없다는 지나친 자만을 들켜버린 거 같아 무안하다. 겨우내 마른 가지에 물기가 돌아 새순이 돋고 꽃이 피는 건 아무도 눈치 못 챌 만큼 쉬운데, 나의 봄맞이는 나물반찬 만들기조차 수고와 아픔이 따르는 일인가 보다. 작은 유리용기 안 노동집약적 소중한 고사리반찬은 아깝지만 떨어지는 봄꽃처럼 그만 안녕이다.
April 16,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