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추리알 먹고 싶다.” 성당에서 받은 본인 몫의 부활절 달걀을 손녀에게 주려 고이 가져오신 아빠에게 그 뜻까지 헤아릴 수 없는 아이의 솔직 화법이다. “축성 받은 부활절 달걀인데 이거 먹으면 되지.” 할아버지는 모르신다는 듯 “엄마가 만들어 준 메추리알 암탉 있거든요!” 나는 대화에 얼른 끼어들며 민망하셨을지 모를 아빠 편을 슬쩍 든다. “아이고, 그 닭 볏이랑 깨눈을 또 박으라고? 이제 그거 못하네요.” 코로나 때문에 3년째 봄 소풍은 물론 운동회, 숲 체험, 견학 등 손꼽아 기다리는 학교 행사들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이에겐 큰 슬픔이다. 전 날 저녁 도시락 재료를 준비하는 내 발에 밟히며 참견을 하고 설레어 잠도 깊이 못 자 출근하는 나랑 눈이 마주쳐 잔소리를 기어이 듣고 말았던 날이 오래전이다. 자연히 김밥, 메추리알암탉, 문어소시지 삼합의 도시락도 1학년을 마지막으로 무기한 생산 중단 상태다.
얇게 썬 당근 조각을 지그재그 닭 볏 모양으로 자르고 끝을 뾰족하게 하여 메추리알 정수리에 꽂는다. 당근 끝이 뭉툭하면 메추리알이 갈라져 잔인한 결과물이 되므로 주의를 요한다. 가장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은 검은깨로 암탉 눈 만들기, 이쑤시개로 눈 위치를 한 번씩 찔러 미리 구멍을 내고 검은깨 딱 하나만 손가락으로 집어 꽂는다. 한 쪽에 십자 칼집을 낸 비엔나소시지는 뜨거워진 프라이팬 위에서 다리를 슬슬 벌린다. 슬라이스 치즈 한 장에 빨대를 콕 찍어 동그랗게 오려내고 거기에 검은깨 하나씩 붙여 문어 눈자위를 완성, 아직 따뜻한 열기가 남은 소시지 얼굴 부위에 붙여줘야 치즈가 녹으며 잘 붙는다. 맞벌이 부모에서 태어난 아이의 숙명으로 일찍 사회생활-어린이집 입소-을 시작했으니 최소 5년 차 똑같은 모양과 구성의 소풍 도시락일 거다. 한 번 정해지면 익숙함을 쫓아 변함없이 나만의 규칙을 반복하는 참 ‘나다운’ 도시락이다.
사이좋게 한 칸씩 김밥-암탉-문어가 차지한 아이의 도시락에 비해 내가 먹었던 엄마표 소풍 도시락은 꾸밈이란 없이 철저히 목적지향성이었다. 정직하게 김밥만 딱 들어있었던, 두 줄이었으니 양은 부족함이 없다. 특징이라면 단면에 깨소금이 가득 묻은, 재료로 속이 꽉 찬 지름이 큰 김밥이다. 엄마의 크고 빠른 손에서 말아진 김밥은 금세 여러 줄이 되어 쟁반에 쌓인다. 도마에서 일정한 두께로 자르기 시작하면 곁에 앉아 잘린 김밥 두 조각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깨소금을 한 쪽에 충분히 묻힌 후 양쪽 김밥에 톡톡 두들겨 도시락에 담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남은 꽁다리는 자연스레 입에 넣어 든든한 아침 식사까지 해결한다. 임신 기간 중 입덧 한 번 없던 내가 유일하게 생각나는 음식이 특징 없이 심심한, 입을 크게 벌려야만 하는 투박한 엄마의 김밥이었다. 아이가 다 커서 아니면, 임신한 몸으로 메추리알 암탉을 요청하진 않을 테니 다행이다. 매일 모니터 앞을 지키느라 안구건조증에 노안도 왔으니 말이다.
평일 내내 기다린 탓에 봄볕 따스한 4월의 주말, 햇살 좋은 한낮 풍경은 핸드폰 카메라로 여러 장 찍을 만큼 특별하다. 토요일 특근 후 돌아가는 늦은 오후는 아직 남아 있는 햇살도, 붐비는 거리의 시끌벅적함도 평범하게만 느껴진다. 주말이라 꼭 설레고 즐거워야 하나,,, 생각이 들 만큼 머릿속과 마음이 물기 없이 건조하다. “네가 태어난 해부터 토요일이 쉬는 날이 되었어. 아빠 엄마는 토요일은 당연히 학교 가는 날이었는걸.” “정말? 일요일 하루만 쉰다니 말도 안 돼!” 아이는 자기는 겪지도 않은 일임에도 부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었다. 주 5일 근무제 전면 시행에도 난 거의 마지막 순번이었다. 토요일 격주 출근에서 오전 근무 등 업무 공백을 핑계로 한 깔끔하지 못한 과정이 떠오른다. 퇴근길 버스정류장에 서서 의식해서 두 눈을 부릅떴다 꽉 감아 몇 초간 유지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렇게 크게 깜박이는 눈운동이 안구건조증에 좋다고 하니. 안경을 착용한 적 없이 시력 1.0 이상을 유지해 온 나에게 18년 차 직장인으로 만난 안구건조증 진단은 억울하기만 하다. ‘두 눈은 건조하지만 기분만은 촉촉해야지.’ 루테인 영양제를 삼키며 더 늦기전 다음 주말 가족 봄소풍을 약속한다. 메추리알 암탉만 빼준다면 3인분 김밥 도시락 싸는 건 일도 아니니까.
April 30,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