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관람이 아닌 한낮에 찾은 극장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상영시간 보다 여유 있게 도착하여 혼자라면 절대 먹을 리 없는 극장팝콘과 콜라도 하나씩 주문한다. 관람하는 일행ㅡ어린이 1인 포함ㅡ이 있는 것뿐인데 조금은 긴장하여 좌석에 앉는다. 아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마음에 걸려 남편과 나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서로 일정을 조율 후 1인 관람 체제를 유지해 왔다. 코로나 영향이 가장 크지만 사전 협의와 양해가 필요한 일이 되니 극장 방문 빈도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부부 동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온 가족 첫 관람 영화는 <탑건: 매버릭>이다. 개봉 소식을 접하고 꼭 극장에서 봐야 해!라는 다짐은 이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봐야겠어!라는 욕심으로 커졌다. 나에게 만만한 ‘여럿이’는 우리 셋이지. 강요가 아니라 새로운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주려는 선의이다. ‘완전 신나.’ ‘그래 그래.’ ‘맞아 맞아.’ 흥분과 짜릿함을 함께 느낄 거란 확신이 들고서야 나란한 좌석 3개를 예매한다.
극장 앞 넘치는 인파 속, 난 엄마와 오빠 손을 꼭 잡고 매표소 앞 길게 늘어선 줄에서 아빠의 뒷모습을 찾는다. 유독 아빠가 선 줄만 줄지 않는 것 같은 조바심에 응원이라도 하는 듯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 드디어 아빠 차례인가, 내 쪽을 돌아보며 영화표 여러 장을 들고 웃는 아빠가 보이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 극장 건물에 들어서니 바깥만큼 많은 사람들로 1층은 이미 꽉 차 있다. 국민학교 4학년, 온 가족이 <터미네이터 2>를 보러 종로3가 서울극장에 갔던 여름날이었다. 이후에도 비디오대여점에서 수차례 빌려 보았기에 생생한 장면들이 온전히 상영관 스크린을 통한 기억이라 할 수는 없다. 상영 시간이 되길 기다리며 먹었던 끈적한 밀크셰이크와 짭짤한 핫도그 맛은 거짓 기억일 리 없지만 말이다. 공격당한 부위를 멀쩡하게 복원하고 신체마저 유연하게 변형하는 T1000에게 쫓긴 긴박감 넘치는 영화의 여파는 컸다. 연년생 남매는 한동안 오토바이, 트레일러 장난감 모형에 집착하고 배우 포토카드 (에드워드 펄롱 위주의) 수집에 진심이었다.
아이와의 동반 관람에 예민해진 신경은 영화 인트로부터 바로 무뎌져 버렸다. Highway to the Danger Zone~ 익숙한 OST가 깔리고 군함 활주로에서 수신호에 맞춰 출격하는 전투기 중 하나가 된 듯 나 역시 <탑건: 매버릭> 영화 속으로 빠져들 준비를 마쳤다. 나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취향을 발견하며 귀와 눈으로 즐거움을 만끽하느라 상영관 강력한 냉방에도 몸 안의 열기가 느껴졌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고서야 스크린에 고정되었던 시선을 아이에게 돌린다. 한숨을 쉬며 찡그린 표정을 보고 “지루했어?” 러닝타임 130분은 역시 무리였나 걱정과 후회가 들 틈도 없이 “벌써 끝난 거야? 와,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어? 진짜 말도 안 돼!” 아쉬움 가득한 감탄의 말이 쏟아진다. 현장 예매 방식이었을 30년 전, 아빠가 영화 티켓을 높이 들고 흔들던 의기양양한 기분을 나도 알 것만 같다. “거봐. 완전 재미있잖아. 안 봤으면 어쩔 뻔했어.” 들킬 뻔한 안도감을 깊게 숨긴다.
고객 동선을 늘리려 의도적으로 엇갈리게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8층부터 뱅뱅 돌아 한참을 내려오면서도 나와 아이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아빠~ 아빠는 별로였어?” 우리의 설레발 탓인지 상대적으로 남편은 큰 감흥 없이 덤덤해 보인다. 앞서 걷던 남편은 갑자기 무릎이 길에 닿을 듯 한 발을 뒤로 뻗어 런지 자세를 잡더니 검지 중지로 가던 방향을 가리키며 짧고 강렬한 출격 수신호로 답한다. 아빠의 돌발행동에 부끄러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깔깔 웃는다. 작년 서울극장이 개관 42년 만에 문을 닫는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가족과의 첫 영화 <터미네이터 2>가 떠올랐다. 아이는 언젠가 무인전투기 뉴스를 접할 때 우리의 첫 단체 관람 영화 <탑건: 매버릭>을 떠올릴지 모른다. 상영관 입장 대기 중 자꾸만 줄어드는 팝콘을 예의주시하며 치사하게 굴었던 아이는 새로운 룰도 하나 받아들인다. 극장팝콘은 관람하며 먹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절반 이상은 먹고 입장하는 거란 걸.
July 16,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