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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무해한 원피스와 힐

무해한 원피스와 힐


“왜 이렇게 차려입었어요. 안 불편해요?” 낯설지만은 않은 질문에 “아니요. 전 편해서요.” 늘 그렇듯 사실이지만 시원하지 않은 대답 끝을 웃음으로 채운다. ‘꾸안꾸’ 컨셉을 작정했을 리 없다. 신경 써놓고 아닌 척 거짓말도 아니다. “이런 옷밖에 없어서요”도 정확한 답변이다. 기상 후 현관을 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까지 1시간 동안 ‘OOTD’를 고민해 골라 입는 건 불가능하다. 몇 분의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쿠션팩트를 이마 양볼에 팡팡 두드려 기미 잡티를 가리는 게 좋겠지. 의도하지 않은 괜한 오해에 억울함까진 아니지만 순간 방어력 잃은 몸이 움츠려든다. 내가 좀 과한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옷차림인가? 시선을 내 몸으로 돌려 가슴부터 발끝까지 훑어본다. 그러나 멈칫거림도 잠깐일 뿐 이후의 나의 옷차림에 조금의 영향도 끼치진 않는다.


40대의 옷장에는 자기 취향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옷을 물려 입을 나이도 아닌, 공유할 일도 없는 100% 내 눈과 손(손가락 클릭)으로 직접 결정한 옷과 소품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나의 선호를 드러낸 채 한 데 모여있어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다.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한 17자 붙박이장, 남편 옷장을 열면 바지걸이에 길게 걸려있는 청바지만 언뜻 봐도 열 장을 넘는다. 선반에 각을 잡고 접혀있는 데님바지도 칸마다 가득이다. 특성상 매번 세탁할 수도 없으니 새 청바지를 사려면 ‘선입선출’ 안 입는 하나는 처분하기를 요청했다. 청바지로 명도 단계표도 만들 듯 내 눈엔 비슷한데 남편은 핏과 색이 전혀 다르다며 거부한다. 반면 내 옷장에 청바지는 딱 4장이다. 기모가 들어간 겨울용, 봄가을용 진청/연청 한 장씩, 나머지는 화이트진이다. 기능에 따른 구색 맞추기용으로 몇 년째 더하거나 빼기 없이 그대로이다.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청바지는 불편해서 꺼려지는 옷이다. 종아리부터 허벅지, 골반까지 감싸는 압박(스키니진이 아니어도)이 어떻게 편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한여름 더위에 얇은 화이트진이라 해도 긴 데님바지를 입는 건 내겐 갑갑하다. 허벅지에 밀착하지 않고 허리만 붙잡는 원피스와 치마는 얼마나 여유로운지. 평발과 반대로 발바닥 아치가 높은 내 발의 특성상 단화보단 어느 정도(5cm 이하) 굽이 있고 바닥이 푹신한 힐이 편안하다. 굽이 아예 없는 플랫슈즈를 신으면 발바닥 전체로 체중이 고르게 실리지 않아 쉽게 피로를 느낀다. 퇴근 후 심하게 붓고 딱딱해진 종아리를 주먹으로 치고 주무르며 잠들기 전 벽에 다리를 세워놓아야 나아진다.


십 대 기억 속, 엄마는 한여름에도 선풍기 앞에서 격일로 아빠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하셨다. 셔츠 칼라(collar)와 커프스(cuffs)를 힘줘 누르는 것을 출발점으로 등판과 양 팔을 거침없이 다림질하는 엄마의 인중에 금방 땀이 맺혔다. 마지막으로 앞여밈 단추 사이를 엄마의 능숙한 다림질로 통과하면 쉴 틈 없이 다음 셔츠 차례다. 한 번도 아빠가 직접 다림질하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으니 목단추까지 채운 한결같이 단정한 셔츠 차림새는 분명 엄마에게 해로웠다. 단, 구두만큼은 연년생 남매의 손끝이 야물지 못해 만족스럽지 않은 탓인지 늘 본인이 공들여 광을 내셨다.


일 년 내내 차려입은 듯 빳빳한 아빠의 셔츠가 엄마에겐 해가 된 것과 달리 나의 원피스와 힐은 온전히 내 손만 타는 무해한 착장이다. ‘난 나야! 난 달라!’를 외치던 X세대~Y세대 문화를 소비했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이 곧 크리에이터이며 브랜드인 시대를 겪고 있다. ‘자기 드러내기’를 종용하는 사회를 줄곧 살아왔으니 확고한 취향에 이제 그만 당당해질 때도 되었다. 바지 대신 원피스와 치마만 빼곡한 옷장과 요족에 가까운 특이한 발의 소유자임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신경 쓰고 꾸민 듯 보는 이에게, 좋아하는 제 모습이라서요. 당신에 대한 애정으로 알라고요! 이쯤의 솔직한 넉살은 여전히 원피스를 입고 (적당한 굽의)힐을 신은 오늘부터라도 부려야지.


August 0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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