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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아픔까지도 나의 일부

아픔까지도 나의 일부


처음도 아닌데 올 때마다 당황할 정도의 갑작스러운 고통이다. 입틀막, 숨마저 몇 초간 참게 만드는 몸 속 가장 깊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통증이다. 틀림없지만 확실한 원인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휴대폰에서 생리주기 앱을 연다. 화면에 뜨는 달력에 역시나 오늘이 배란일임을 알리는 분홍색 동그라미가 선명하다. 색 구분되어 있는 나란한 7일의 배란기 중 어쩜 오늘 같은 순간은 배란일 또는 D±1, 그 이상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다. 분명 함께 존재했을 생리통과 배란통 사이에는 무려 20년의 시간차 공격이 있었다. 생리 예정일을 한참 앞두고 꼭 닮은 기운과 강도의 통증에 원인도 모르고 진통제를 찾았다. 문득 배란통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앱에 기록된 날짜를 보니 퍼즐처럼 정확히 들어맞는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내가 겪어야만 존재를 실감하는 것들이 있다. 서른 중반 뒤늦게 알게 된 배란통이 그렇다.


만성 저혈압 진단을 받은 나에게 여름은 가장 피하고 싶은 ‘혼이 나가는’ 계절이다. 말 그대로 일년에 한 번, 특히 무더운 여름 예기치 못한 어지럼증에 정신을 잃었던 기억이 장소와 시간만 다르게 여러 번이다. 출근 또는 퇴근길 지옥철 안, 등 뒤로 흐르는 땀 방울이 기립근을 타고 내려가다 종아리까지 닿아 떨어진다. 순간 더위도 이겨버린 서늘한 긴장에 몸이 휘청거리고 만다. 현기증에 균형을 잃어 발목이나 허리를 접질린 걸까. 반대로 잘못 내디딘 걸음에 허리를 삐끗하여 뾰족한 통증에 놀라 쓰러진 걸까. 명확한 선후, 인과 관계는 알 수 없지만 뼈가 어긋난 듯한 아픔과 ‘두둑’ 하는 소리까지 생생한 기억은 두렵기만 하다. 놀랍게도 삼십 대가 되어, 정확히 출산 이후 정상 혈압인이 되었다. 건강검진 결과에서 저혈압 경고나 빈혈에 좋은 음식 리스트(무말랭이부터 시작하는,,,)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갑작스러운 쓰러짐에 대한 불안도 잊히고 있다. 배란통과의 바통 터치인가, 오랜 기간 함께 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아픔이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요 며칠 불혹을 넘긴 친구들과의 메신저 창에 반복되는 화두는 부인과 진료와 검사 결과다. 생리가 몇 주째 계속되어 산부인과 진료와 검사를 받았다는 친구의 말이 시작이었다. 친구 몇 명이 부정출혈에 대한 증상도 처방도 모두 비슷한 본인의 경험담을 릴레이처럼 이어간다. 얼마 전 나 또한 한 달 가까이 부정출혈이 있어 자궁초음파 검사를 했다.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아 우선 피임약을 처방받았지만 복용 직후 매스꺼림과 두통에 더는 먹지 못했다. 친구 한 명은 검사 결과 ‘자궁선근증’이 의심된다며 의사가 피임기구 시술을 권유했다고 한다. “피임도 필요 없는 나이에 이제 와 피임기구 시술이라니 웃기지 않니?” 전혀 웃을 수 없는 친구의 말에 위로와 걱정의 말들이 바로 쏟아진다. 한 해 한 해 나이테처럼 켜켜이 나이를 먹을수록 삶에 익숙해져 고통의 역치는 높아질 거라 자만했다. 내 몸은 반대로 아픔에 더 예민해져 나를 돌보고 지키라고 말해 주고 있다. 

 

요즘은 생리통보단 배란통을 더 심하게 느끼며 스스로에게 짠한 마음이 든다. 4주-내겐 25일-의 주기로 난소에서 만들어진 성숙한 난자를 내보내는 것이 이토록 힘이 드는 일이 되었구나. 애쓰고 있는 내 자궁이 안쓰러워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일부러 오랫동안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따뜻한 기운이 약효와 함께 빨리 스며들기를 바라면서 나를 어루만져 준다. “아프면 너만 억울해. 밥 잘 챙겨먹고~” 듣기 좋을 리 없는 엄마의 잔소리를 꾹 참고 들으며 다짐한다. 아픔도 내 거로 잘 돌볼 거라구요!


August 1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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