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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완벽한 거리 두기

완벽한 거리 두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나태주의 시 <풀꽃1> 첫 문장에 시선이 머문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진리처럼 느껴지는 완벽한 표현이 나의 아량 없는 일상에서는 설득력을 잃는다. 여름도 막바지인가, 바람 끝에 서늘한 기운이 들어 겁도 없이 팔다리를 휘저으며 집안 청소에 힘을 쓴다. 일요일 오후, 벌써 두 번의 샤워를 하고 나니 ‘어림없지!’ 늦더위의 비웃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머리카락 물기가 마르기도 전 등은 다시 땀으로 축축해져 결국 분노의 역치는 낮아지고 만다. 허락 없이 내 동선과 겹치며 빨간불을 켜게 하는 아이의 행동에 “그만~ 좀 떨어져 있자!” 버럭쟁이 엄마 등장이다. 베개에 파묻은 잠든 옆얼굴이 떠올라 출근하자마자 그립다. 연일 야근인 주엔 휴대폰 속 아이 사진을 보고 또 보며 힘을 낸다. 떨어지면 바로 애틋해 하면서, 한 몸처럼 붙어있는 건 주말 48시간을 못 버티는 한없이 가벼운 내가 우습다. 


분위기 전환에는 장소를 옮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미 땀에 젖은 몸, “배드민턴 치러 나갈래?”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목소리만 던진다. 눈치 보느라 가늘어진 눈, 불만 가득 흘겼던 눈이 반짝 빛을 내며 동그랗게 커진다. 배드민턴 가방, 내 물 한 병까지 척척 챙겨 보란 듯 현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흙과 잔디에서 쓰고 떫은 여름 냄새가 올라온다.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진 배드민턴 코트 선 안으로 들어가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본다. 부족한 실력 탓에 우린 대결이 아닌 긴 랠리 유지가 목적이다. 간격이 너무 멀면 달려가도 받을 수 없고, 너무 가까우면 뒷걸음치다 균형도 셔틀콕도 잃는다. “너무 짧았어요. 더 세게 쳐볼게요.” “앗, 이번엔 내 실수~ 높게 보내 줄게.” “와, 엄마 우리 30번 넘었어. 최고 기록이야!” 누가 들을까 민망한 애정 가득한 응원을 주고받는다. 셔틀콕이 오고 가는 거리만큼 우리 사이 평온한 간격 두기를 연습하고 있다.


인간관계는 최선을 다해 가깝고 밀접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강요받은 세대였다. 혼자인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괴짜, 특이한 이로 여겨졌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겪으며 ‘집합 금지’ ‘친목모임/ 회식 금지’,,, 대한민국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약속이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전면 해제되었지만 코로나 3년차 경력을 가진 우리는 각자 가장 행복할 수 있는 타인과의 거리를 깨달았다. 나를 컴퍼스의 누름못처럼 중심에 두고 원하는 거리만큼 컴퍼스의 다리를 벌려 완전한 원을 그린다. 일정한 간격을 두어야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 그 안에서 나는 평온하고 안전한 기분을 느끼며 회생한다. 아이와 나 둘 다 만족스러운 배드민턴 경기를 마치고 학의천을 산책하기로 한다. 징검다리만 만나면 꼭 건너야 하는 것이 아이들의 본능일까? 불안감에 나도 바로 뒤를 쫓아 징검다리를 건넌다. 약 50cm 간격으로 놓인 돌, 큰 보폭으로 걸어도 되지만 안정감 있게 건너기 위해선 몸을 위로 가볍게 뛰어야 한다. 내 나이에도 이렇게 한 발씩 리듬을 타는 ‘폴짝’ 점프라니. 하나로 이어진 다리가 아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인 징검다리가 고맙다.


하동균의 <From Mark>- 샤이니의 <너와 나의 거리>-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실컷 울고 싶을 때, 반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고 싶을 때 반복하는 플레이리스트이다. 가까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의 음악 취향을 공유하는가 이다. 오늘도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리스트를 눌러 침대로 가려다 불 꺼진 아이 방을 들여다본다. 나만의 시 첫 문장이 문득 떠오른다. ‘멀리 훔쳐보아야 예쁘다.’ ‘가만히 오래 자야 사랑스럽다.’ 출근길 서늘한 아침 공기에 드러난 팔뚝 솜털이 밉지 않다. 차가워진 바람에 아이가 원하는 밀착된 거리도 허용할 아량과 자비가 생기는 가을이 오고 있다.


August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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