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때를 지난 한겨울 아침 기상은 쉽지 않다. 일 년 내내 변함없는 무음 진동의 모닝 알람이지만 내 몸 반응속도가 가장 느려지는 때도 요즘이다. 가뿐 까진 아니어도 휴대폰 액정에 뜬 ‘중단’을 누름과 동시에 일어나는 평소와 다르다. 달팽이 진액같이 끈적한 미련을 침대 시트와 내 몸 사이 몇 초간 느끼며 겨우 몸을 일으킨다. 아이의 점심인 보온도시락 뚜껑에 포스트잇을 붙이면 기상 후 50분간 타임라인의 마지막이다. 선 채로 한숨 돌리는 열차 안, 펼친 책을 5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눈이 감긴다. 도돌이표 악상이라도 있는지 읽던 줄을 자꾸만 읽다 결국 앞 장으로 돌아가면 포기하고 책을 덮는다. ‘아아, 오늘 정말 괜찮을까?’ 카페라테를 움켜쥐고 종종걸음으로 회사로 향한다. 10분간 적당히 식은 카페라테를 책상에 앉자마자 한 모금 가득 마시면 층층의 불안을 걷어낼 의지가 생긴다. 마지막 한 모금 커피를 마실 때쯤이면 무거웠던 피로와 두려움은 마법처럼 사라진다. 그 후로는 매뉴얼화된 익숙한 동선을 그리며 가볍고 유연해진다.
4번 GATE를 통해 객석에 들어선 순간, 빈틈없는 붉은 조명에 숨이 막혀 감탄사가 터진다. 무대 왼쪽 상징적인 빨간 풍차, 오른쪽엔 영국에서 배를 타고 온 코끼리(장식)가 있다. ‘말로만 듣던 너구나.’ 새빨간 조명에도 천정에 달린 열 개의 샹들리에는 금빛으로 화려하다. 뮤지컬 <물랑루즈!> 노골적으로 자본주의 냄새를 풍기는 공연은 티켓 가격부터 논란이었다. 1층 대부분은 물론 2층 3열까지, 전체 관객석의 48%가 18만 원짜리 VIP석이다. ‘그래, 알겠다고. 달콤한 자본의 맛을 실컷 즐겨주겠어.’ 공연 10분 전 프리쇼, 무대 위 몸을 흐느적대며 담배 연기를 뿜는 클럽 물랑루즈 댄서들이 관객에게 최면을 걸어온다. 그네를 탄 은빛의 사틴, 하이라이트 등장 scene을 공연 시작 20분이 지나서야 만난다. 온몸에서 빛을 발하는 그녀의 겉모습은 분명 다이아몬드만큼 반짝인다. ‘Diamonds are forever and ever!’ 핏빛 선명한 욕망을 170분 쉴 틈 없이 분출한 <물랑루즈!>의 마법은 강력했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던 막차 버스에서부터 내 음악 어플 재생목록은 물랑루즈 넘버가 전부다.
8세 이상 관람이 아닌, 온전히 날 위한 오랜만의 어른 뮤지컬이라 감흥이 오래간 걸까. 운명 같은 만남, 재력과 권력을 쥔 자의 방해, 죽음으로 완성하는 영원한 사랑이란 뻔한 전개에도 깍지 낀 손에 땀이 찬다. 무대 위 열정을 쏟아내는 연기와 노래, 몸을 내던지는 강렬한 춤은 더 뻔하고 흔한 일상을 사는 내 숨을 가쁘게 한다. 틈만 나면 Moulin Rouge! The Musical 앨범을 재생한다. <Shut Up And Dance With Me> 이어폰을 통해 내 안에서만 진동하는 울림에 기분 좋은 마법에 걸린 걸까. 무리한 일정을 요구하는 고객사, 제대로 체크하지 않아 실수를 반복한 팀원에게도 미간 주름부터 좁혀지지 않는다.
귀에 물랑루즈 넘버를 흘리고 입안에 커피를 쏟아 넣으며 불안을 잠재운다. ‘입다물고 춤이나 추는 거야!’ <코스모스> 마지막 13장에서 칼 세이건은 말한다. 우주적 시각에서 인간은 희귀종이자 멸종 위기종이기에 하나하나 모두 귀중하다고. 정확히 한 달 후, 완벽히 다른 배우 캐스팅 페어로 티켓 예매를 완료한다. 좌석은 물론 VIP석이다. 흔한 일상을 살아내는 소중한 나를 위해 비싼 마법이 필요하다.
January 14,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