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맥주를 만드는 나만의 레시피가 있다. 출근길 take-out 카페라떼 말고는 하루 종일 물 한잔 마시지 않고 지내다 야근 후 돌아온 밤 10시, 목 넘김이 따가울 정도로 입안 가득 넣어 ‘꿀꺽’(정말 소리 나게) 삼키는 맥주는 꿀맛이다. 몸속 혈관과 내장이 기다렸던 수분을 쭉쭉 빨아당기는 흡수력까지 느껴지는 듯 어질하다. 저녁으로 주문했던 식은 버거를 가방에서 꺼낸다. 제때 먹었어도 어차피 온기 없는 메뉴인데다 평소보다 2시간은 이른 저녁이라 입맛도 없어 그대로 넣어 두었다. 맥주와 함께 식탁 위에 올려 놓는데 잠들 준비를 하던 아이가 내 앞 시야를 작은 몸으로 완전히 가리고 마주 앉아 눈을 맞추고 싶어 한다. “한 입 먹어 볼래?” 웬일로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절반 조금 덜 되게 잘라 준다. ‘한참 지난 내 끼니인데 이쯤 되면 찐사랑이야.’라며 생색을 내려다 그만둔다. 엄마와 마주 앉을 명분을 위해 늦은 밤 굳이 먹고 싶지도 않은 버거를 한 입 하는 모습을 보며 ‘날 향한 너의 애정이 더 크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반사신경-질’을 차분히 참으면 날 위한 거란 걸 금방 이해하면서도 질색하던 엄마의 행동이 있다. 메인 요리가 남아 있으면 수저를 내려놓기 직전에 엄마는 재빠르게 아빠와 내 몫을 할당하기 시작하셨다. 특히 생선구이가 그랬다. 직접 생선 살을 발라 원형 접시 안 각자의 방향에 반드시 먹어야 할 분량을 깔끔하게 배분한다. 끝까지 더 먹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란 걸 알면서도 엄마의 분주한 젓가락에 의해 원치 않는 걸 강요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에 꼭 한 번, 주말엔 오전/오후 때마다 걸려오는 아빠의 안부 전화도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관심이며 변함없는 애정이다. 그러나 나에겐, 이제 바통을 이어받은 딸에겐 때때로 모르는 척하고 싶을 만큼 귀찮다는 걸 아빠도 눈치챘겠지. 애정에서 비롯된 행동을 온전한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주는 사람의 욕구를 그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로 인해 가족이 건강하다는 걸 확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기꺼이 내 전화를 받고 원하는 다정한 말을 들으며 일상 속 휴식을 즐기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기쁨은 여느 감정과는 다르게 크게 부풀리지 말고 조그만 형태로 간직해야 한다.’ <핑크트헨과 안톤>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말을 적어두었다. 어쩌면 애정 또한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다. 내 감정만을 앞세워 크게 부풀어버린 애정은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풍선처럼 한순간 위험할 수 있다. 애정이라는 감정은 표현하는 내가 아닌, 받는 상대가 원하는 상태와 모양으로 섬세하게 매만져 빚은 후 건네주어야 한다. 마트료시카 가장 마지막 나오는 작고 소중한 인형처럼. 그 정제된 애정을 진심으로 바라는 순간 얻어야 완전한 행복이 된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때를 기다릴 줄 모르는 애정은 ’표출’ ‘해소’에 가깝다. 좋은 감정일지라도 드러내기에 조심하는 지금의 시대에서 나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직접적으로 티 내지 않는 은근한 ‘츤데레’가 더 마음에 든다.
가장 절실할 순간, 온몸에 퍼지는 청량감을 위해 꾹 참은 맥주 한 모금은 달콤함이 된다. 애정하는 이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기 위해 그의 지금 행동(햄버거 먹기)도 함께 하려는 아이의 어린 마음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허기에 지친 것도 간절한 걸 나눠준 것도 아니면서 찐사랑이라며 생색을 내려던 어른 마음이 가벼워 부끄럽다. 퇴근길 회사 근처 지하철 출발역부터 환승역까지 7개를 지나며 머릿속에 ‘애정’을 가운데 두고 연관성 있는 단어를 나열해 간다. 속이 뻔한 욕구를 애정이라 포장했던 장면을 떠올리다 보니 금세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다. 어쩌다 이번 주도 야근으로 시작한 월요일, 오늘은 회사에서 저녁 먹고 일했다는 말에 아이는 “엄마, 그럼 힘들 텐데 맥주라도 마셔요.”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취침 시간을 미루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읽혀 눈을 흘기다가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누구보다 날 애정 하니까!’라는 결론에 이르니 웃음이 난다. 너의 권유에 못 이긴 척 맥주를 꺼내는 밤이다.
June 04,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