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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노래

by 가을산

올리비아 허시가 나온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건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가 서서 보았다.

지금은 극장의 빈 좌석이 없으면 입장을 못 하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인기 있는 영화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서서라도 보려 했다. 극장 앞에 있는 매표소에서는 극장 내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돈만 내면 표를 주었다. 만원 버스처럼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들어가게 해서 통로도 사람들로 꽉 찼다. 버스에 서서 가도 같은 요금을 내는 것처럼 서서 봐도 관람료는 같았다. <벤허>도, <사운드 오브 뮤직>도, 혼자 가서 객석 맨 뒤에서 울며 본 <라스트 콘서트>도 서서 보았다.


‘문화교실’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단체로 간 영화 관람. 집에 TV가 없던 초등학생 때, 영화는 학교에서 시간을 내어 체험하게 한 유일한 ‘문화’였다. ‘문화교실’ 가는 날은 소풍날처럼 설렜다. 소풍 때처럼 비 올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한두 시간 공부도 안 하고 가니 더욱 좋았다. 수학여행 때면 경비가 없어 못 가는 아이가 한두 명은 있었는데 ‘문화교실’은 관람료를 별도로 내지 않으니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앉아서 보았나 보다. 무슨 영화인지 몰라도 남녀가 입 맞추는 장면이 나와 우리가 몇 좌석 건너에 있는 옆 반 남자 선생님을 돌아보니 짐짓 딴 데를 쳐다보던 모습이 생각난다. 많이 본 건 ‘돌아온 아저씨’ 같은 반공 영화였다. 철모에 삐죽삐죽한 푸른 나뭇잎을 두른 병사가 숲에서 튀어나와 ‘나는 대한민국의 일등병이다!’ 하는 모습이 늠름해 보였던 게 기억난다. 조마조마한 순간, 진녹색 탱크가 굴러오면 와~ 하고 손뼉을 쳤고, 국군이 나타나 적을 물리쳐 이기면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손뼉을 쳤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중학교 때부터는 관람료를 따로 냈다. 매번 돈을 타내느라 아버지와 실랑이했다.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도 극장에 갈까 말까 한데 나는 일 년에 몇 번씩 영화를 보겠다고 했구나, 한참 뒤에야 깨닫고 미안했다.

서서 보기에 ‘전쟁과 평화’는 몹시 길었다. 책을 안 봐서 내용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초반에 나타샤가 춤추는 무도회 장면만 재미있었다. 전쟁을 어찌나 오래 하던지. 적당히 하다 국군이 나타나 이기는 식이면 얼마나 개운할까만. 너무 지루하고 다리가 아파 차라리 영화가 빨리 끝났으면 했다. 지방 도시라 영화관이 적은 탓이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와서부터는 영화를 서서 본 적이 없다.

단정하게 빗은 검은 머리에 폭넓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줄리엣을 통로에서,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의 머리와 어깨 사이로 보았다. 빈틈으로 겨우 화면을 보고 자막을 읽었다. 아는 이야기니 자막을 못 봐도 흐름을 따라가는 데 지장은 없지만 시야가 트이지 않아 답답했다. 앞쪽 계단에 앉아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서 있을 자리를 찾고 있을 때 부드러운 멜로디와 함께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목 사이로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니 푸른 모자를 쓴 앳된 얼굴의 청년이 보였다. 그가 사람들이 에워싼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서 양쪽 색깔이 달라 보이는 타이츠를 신고 서서 온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 노래는 불편한 자리도 잊을 만큼 감미로웠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노래 부르던 장면만 생각났다.

시간이 지나며 잊었을 텐데 고 2 어느 수업 시간에 한 아이가 앞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바로 그 노래였다. ‘캐플릿가의 축제’라고도 불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가. 머릿속에서 영화가 재생되었다. 푸른 모자를 쓴 청년이 아름답게 노래하던 장면이 펼쳐졌다. 다시 들어도 좋았다. 그 노래를 듣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놀랍고 반가웠다.

합창반이었던 그 애는 노래를 잘 불렀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특히 잘 불렀다. 그 애가 다른 노래를 부르면 마치 가수가 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이상했다. 그래서 불려서 앞에 나온 그 애가 ‘뭐 부를까?’ 하고 물어보면 우리는 언제나 ‘로미오와 줄리엣!’ 했다. 그 아이의 대표곡이자 불멸의 신청곡이었던 셈이다.

영화를 볼 때나 그 애의 노래를 들을 때나 뜻은 잘 몰랐다. 아니, 어떤 단어인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영어를 글자로 배워 듣기가 안 되는 그 시대의 보통 학생, 나. 그런데 그 애는 영어로 된 노래를 외워서 부르다니 다 들린다는 거 아냐, 하여 더 감동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가사를 알게 되었는지는 생각도 안 해보고 부러워하기만 했다. 가사를 물어보지도 못한 채 한 해가 끝나고 3학년 때는 다른 반이 되었다. 그 후 그 아이를 거의 보지 못했다. 이름이 불리면 못한다고 빼지 않고 곧장 나와서 아이들이 좋아했던 그 아이, 원하던 음대를 가서 더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 있게 노래 부르는 가수나 성악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대학생이 되어 잠시 합창 동아리를 할 때 ‘로미오와 줄리엣’을 또 만났다. 아무래도 이 노래와 인연이 있나 보다. 편곡한 악보에는 영어 대신 우리 말 가사가 씌어 있었다.

“젊음이란 타오르는 불

아가씨들 냉정과 욕망

세월은 빨라

꽃이 피면 곧 시들고

오 젊음도 이처럼 사라지네......”

지금도 입에서 줄줄 나오는 우리 말 가사로 노래에 담긴 대강의 뜻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노래가 그리 아름답거나 감미롭게 들리지 않았다. 지휘자도 발표곡 중 가장 촌스럽다고 할 정도로 가사도, 곡도 진부한 느낌이 들었다.

노래 가사처럼 세월은 빨리 가고 온라인 세상이 열렸다. 어느 날 문득 고2 때의 그 아이가 생각나 ‘로미오와 줄리엣’ 노래를 찾아보았다. 온라인 세상은 넓고도 넓어 그 노래도 있었다. 다시 보게 된 영화 속의 영상은 나를 저 먼 중, 고등학교 시절로 데리고 갔다.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났다. 연푸른 모자를 쓰고 색깔 다른 타이츠를 신은, 소년과 청년 사이 어디쯤 있는 남자가 내가 원하면 몇 번이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고 감미롭기만 했다. 원곡의 힘일까? 노래하던 홍안의 미소년도 어디선가 나처럼 나이를 먹어가고 있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을 부르는 동안은 영원히 소년으로 남아있으리라.

“What is a youth

......

A rose will bloom

It then will fade

So does a youth

So do--------es the fairest maid”


마침내 원어 노랫말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렇게 어려운 단어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안 들렸을까? 영상에 나와 있는 번역도 보고 사전도 찾아가며 비로소 뜻을 다 알게 되었다. 노래 한 곡을 이해하는 데 평생이 걸렸네.

노랫말 가운데 가장 감미롭고 애틋하게 들린 단어는 ‘rose’도, ‘love’도, ‘honey’도 아닌 ‘does’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면서도 그 말에 애간장이 녹는 듯했는데 그게 고작 ‘does’ 였다니……. 예쁜 말만이 감동을 주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단어만 늘어놓는다고 아름다운 글이 되지도 않는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한 말이라도 간곡하고 절실하게 가락을 얹고 마음을 담으면 심금을 울린다.

고2 때 그 아이는 가끔 이 노래를 부를까?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앞에서 가수처럼 힘껏 노래했던 여고 시절과 그 교실 풍경을 기억할까?


그 아이를 부러워했던 나도 이제 이 노래를 원어로 부를 수 있다. 동영상 덕분이다. 미소년이 노래하는 영상을 보며 수십 번 따라 불렀더니 웬만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이만큼 잘하지는 못해도 뜻을 알기에 감정을 넣어 불러본다. 부족한 기술 점수를 메울 예술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수만 관중 앞에서 할 공연이 아니니 괜찮다.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즐겁다.

혼자 연습하는 피아노로도 이 노래를 칠 수 있다. 오래전에 아이들이 쳤던 생각이 나서 악보집을 찾아보니 쉽게 편곡된 게 있었다. 드물게, 틀리지 않고 잘 쳐지면 기분이 아주 좋다. 수시로 노래 부르고 피아노 치며 요즘 ‘로미오와 줄리엣’에 푹 빠져 산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치거나 부르고 있는 동안은 나도 볼 빨간 소녀가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계기로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 배워보기로 마음먹었다. 좋아하지만 가사가 안 들려 어물쩍 넘어간 팝송이나 영화나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를 확인해서 제대로 불러보려고 한다. 아무 때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배울 수 있는 동영상 선생님이 상시 대기 중이니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영상으로 배우면 시간에 맞춰 갈 필요도 없고 잘하는 사람 앞에서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떼었고 ‘사운드 오브 뮤직’을 배우는 중이다. ‘오 솔레미오’와 ‘에레스 뚜’, ‘오페라의 유령’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 노래 저 노래, 부드럽고 힘찬 노래의 날개를 타고 저 푸른 하늘을 마음껏 유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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