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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책가방

by 가을산

학교가 멀었다. 십분 남짓 걸었던 초등학교에 비해 버스로 열두 정류장 거리인 중학교는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정해진 등교 시각에 늦지 않으려면 아침 7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버스 정류장에 이르러 보면 교복을 입은 남녀학생들이 새까맣게 모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탈 버스는 유난히 타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 학교까지 가는 길에 정류장 이름이 중,고등학교 이름인 곳만 네 개는 되었다.

행여 오는 버스를 놓칠세라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목을 있는 대로 늘이고 눈도 자주 깜빡거리지 않았다. 저 멀리 기다리던 버스의 번호가 보이면 사람들은 승차 확률을 높이기 위해 미리 차도로 내려섰다. 버스가 어디에 설 지 몰라 차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면 교통순경이 나타나 호루라기를 불며 사람들에게 인도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버스가 가까이 오면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결승 테이프를 끊으려는 달리기 선수처럼 폭발적인 스퍼트를 했다. 장차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유망한 종목은 단거리 달리기가 될 거라는 말이 우스개로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말 빨랐다.


정차한 버스 앞에 당도하나 좁은 출입구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 타기가 쉽지 않다. 버스가 설 때 먼저 땅바닥에 내려선, 차장이라 불렀던 버스 안내양이 몇 번이나 한 사람씩 타라고 해도 금세라도 버스 문이 닫혀 못 타게 될까 봐 죽기 살기로 몸을 들이민다. 뒤차가 금방 오니 다음 차를 타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뒤차가 오기야 하겠지만 언제 올지 모르고 이 차를 못 타면 지각할 수도 있으니 다들 필사적으로 틈을 파고든다. 전쟁 같았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승차 전쟁이었다.


버스 운전사와 차장도 무척 힘들었을 테다. 열 몇 살밖에 안 된 차장이 땅바닥에서 가녀린 팔로 덩치도 큰 승객들을 위로 밀어 올렸다. 버스 문을 못 닫으니 그만 타라고 해도 사람들은 악착같이 매달렸다. 버스가 스르르 움직임에 따라 차장도 몇 발짝 걸어가며 허용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을 들이고 자신의 발 두 개를 간신히 문 앞의 계단에 올려놓으면 한 손으론 차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 차체를 탕탕 두들기며 큰 소리로 ‘오라~이!’하고 외쳤다. 그 소리를 신호로 버스는 부웅~ 하고 속력을 높인다. 버스 문은 가면서 닫힌다.


‘오라이’는 이제 가라는 말인 줄 알았다. 중학생이 되어 영어를 배우고도 그랬다. 차장이 차체를 두드리며 기세 좋게 외치던 ‘오라~이!’ 소리는 아주 시원스럽고 통쾌했다. 어린 차장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권력 같았다. 고등학생쯤에야 ‘오라이’가 ‘출발~’이 아니라 ‘All right’이라는 걸 알고 나자 왠지 허망했다. ‘가세요!’가 아니라 ‘이제 여기는 정리됐으니 가셔도 좋습니다.’라는 뜻이었다니. 소녀티도 채 벗지 못한 버스 차장들에게 권력이란 없었다.


버스에 무사히 올라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도 없는 버스 안. 똑바로 서 있기도 어렵다. 콩나물 시루를 보기 전에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를 먼저 경험했다. 사람들이 막 올라탄 출입구 쪽에 잔뜩 몰려있으면 차장이 ‘차 한 번 돌려주세요’ 하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그러면 운전대를 어떻게 돌리는지 차체가 왼쪽으로 휘익, 기울었다. 아악~ 소리를 지르며 서 있던 승객 모두가 차의 왼쪽으로 쏠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천정이나 의자 옆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꽉 붙들고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어떨 땐 모르는 남학생과 천정의 손잡이 하나를 같이 붙잡고 있기도 했다. 께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버스가 다시 똑바로 서면 내 몸도 바로 세워지고 발을 편히 놓을 자리도 생긴다. 밀가루가 수북이 담긴 그릇을 흔들면 평평하게 되는 것과 같다. 자칫 버스가 기울다 사람들의 무게로 완전히 넘어져 버린다면, 하는 생각을 하면 아찔했다. 뒤에서 본다면 ‘어어, 저 버스 왜 저래?’ 했을 테다.

한정된 공간에 승객은 초, 초과여서 어쩔 수 없었을까? ‘적재정량 몇 kg’이라는 말은 한참 뒤에 들었다. 당시 버스는 정량의 세 배 이상은 실었을 것 같다. 몸과 몸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호흡도 나누었던 그때, ‘코로나 19 바이러스’ 같은 게 있었다면 100% 감염되어 통째로 격리 대상이 되었을 테다.


그날도 사람들은 막 도착한 버스의 출입문으로 쇄도했다. 밀고 밀리며 나도 진군하는 무리에 끼었다. 어느 순간 몸은 앞에 있는데 책가방이 뒤에 있는 사람들의 몸에 꽉 끼어 버렸다. 가방의 손잡이만은 내 손에 있어 힘껏 당겼지만 가방이 당겨오지 않았다. 더 센 힘으로 한 번 더 빡, 잡아당겼더니 가방은 안 오고 북,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가방을 보니 옆 솔기가 길게 뜯겨 있었다. 책들이 비어져 나오고 몇 권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정신이 아뜩했지만 뒤에서 다른 버스가 오는 걸 보고 책을 주워 인도로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도시락까지 떨어져 음식물이 바닥에 쏟아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얼마나 남세스러웠을까 하면서.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남세스러웠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보였다. 정말 창피했다.


돌이켜보니 보는 사람들은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다. 구경꾼의 입장이라면 나도 재미있었을 것 같아서다. 도시락까지 쏟아졌으면 더 좋은 구경이 되었을 테다. 밥과 오뎅 볶음이 차도 여기저기에 흩어지고, 혹 김치 든 유리병이 깨지기라도 했다면 낭자한 김칫국물에 유리 조각이 튀어 더더욱 볼 만 했으리라. 좀 안 됐긴 해도 치명적이지만 않으면 남의 불운은 재미있다. 주인공이 온갖 고생을 해 불쌍하면서도 재미있는 모험 소설처럼.

집으로 가야 되나 하다가 집에 간다고 당장 무슨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면 골치만 아프니 그냥 학교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다음 차가 왔고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아 무난히 탈 수 있었다.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모은 가방을 남학생처럼 옆구리에 끼고 버스를 탔다.

버스에 서서 가는 동안 본의 아니게 불량 학생 같은 모습이 된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차장이 쳐다보는 앞에서 내릴 때도, 학교까지 걸어가고 교실 문을 들어설 때도, 귀갓길에 다시 그 모양으로 버스를 타고, 내리고, 집까지 걸어올 때도 내내.


이제 와 생각하니, 뭘 그렇게까지, 싶다. 모처럼 불량 학생으로 보일 기회를 얻었으니 껌이라도 하나 씹고 다리라도 건들거리며 맘껏 불량한 자세를 취해봐도 좋았을걸. 여유는 늘 지난 뒤에 온다.


그 가방을 수선집에서 꿰매어 썼는지 꿰맬 수 없다고 해서 새 가방을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는 만원 버스를 타지 않지만 어쩌다 출퇴근 시간의 혼잡한 지하철 안에 꽉 끼어 있을 때면 그때 일이 떠오른다. 학생들의 배낭을 보고 저렇게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면 내 가방도 뜯어지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도 한다.


요즘도 가끔 학교 가는 꿈을 꾼다. 대부분 지각할까 봐 애태우는 내용이다. 학교에 가는 게 지상 과업이던 때가 있었다. 책가방이 찢어지면서까지 갔던 학교에서 무얼 배웠을까?


학교에서 배워 남아있는 건 약간의 지식, 몇 개의 시와 노래. 알게 된 건 내가 무슨 과목을 좋아하고 무슨 과목을 싫어하는지와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애라는 것,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 한편 나를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따뜻한 눈길을 보이고 칭찬하는 선생님도 있다는 것. 학교에 갔기에 지금까지 만나는 좋은 친구들도 얻었고 잊지 못할 추억도 쌓을 수 있었다.


책가방이 찢어져도 옆에 끼고라도 반드시 가야 했던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온 세상이 학교다.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아 과목 수가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많다. 주요 과목이란 없다. 좋아하는 과목을 배우면 된다. 하루에 한 과목만 배워도 되니 책가방이 찢어질 일도 없다. 점수를 적고 석차를 매겨 주는 성적표도 없으며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다면 내가 떠나면 그만이다.

‘학이시습지, 면 불역열호, 아.’ 이것도 학교에서 배웠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 말씀. 그렇고말고요. 다시 만난 학교에서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는 학생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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