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남자가 있다. 초1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귀엽거나 남자다웠느냐고? 아니다. 그 아이는 나에게 말할 수 없이 더러운 짓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한동안은 공책 대신 갱지를 끈으로 묶은 연습장을 썼다. 거기에 ㄱ ㄱ ㄱ..., ㄴ ㄴ ㄴ... 한글 자모음을 되풀이해서 썼다. 글자를 알고 입학하는 아이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그렇게 한글을 배웠다. 1+1=2 같은 산수 문제도 풀었다. 바로 거기에 잊을 수 없는 남자는 침을 뱉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밉살스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나는 옆 분단에 앉은 그 애를 제대로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뒤에 있는 친구와 놀다가 돌아앉아 보면 ㄷ ㄷ ㄷ..., ㄹ ㄹ ㄹ...이라 써놓은 연습장 한가운데 침을 뱉어놓았다. 화장실에 갔다 와도 누르스름한 종이에 그보다 더 누런 침이 뱉어져 고여 있었다. 한 번이라도 참기 어려웠을 텐데 두 번도 아니고 열 번도 아니었다. 1학년 산수 실력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뱉었다. 야~ 소리 지르며 물고 뜯고 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침 뱉는 것도 싫었지만 더 싫은 건 뱉어놓은 침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당시 휴지를 가지고 다니는 여덟 살 아이는 없었다. 지금처럼 휴지가 흔하지 않아 가지고 다닐 것도 없었다. 교실 안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도 휴지는 없었다. 그러니 소맷부리로 닦을 수도 없고 그 더러운 침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때로는 참아도 눈물이 질금거렸다. 할 수 없이 연습장 뒷장을 찢어 닦았는데 뻣뻣한 종이로는 말끔하게 닦이지도 않았다.
웬만큼 침은 걷어냈지만 종이가 척척하게 젖어있어 그 장에 글자를 쓰기도, 넘겨서 쓰기도 어렵고 연습장을 덮을 수도 없었다. 공부하는 연습장을 찢기도 싫었고 내 물건에 그 애의 침이 묻고 남아있는 것도 정말 싫었다. 침을 닦느라 더러워진 손을 씻으려면 운동장 구석에 있는 수도까지 가야 하는데 침 닦느라 시간도 갔을 테니 금방 수업 시작종이 울릴까 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런 형편이니 수업이 시작되어도 어찌 평온하게 선생님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었으랴.
연습장 시대가 끝나고 과목별로 공책을 따로 쓰게 되었지만 그 애의 침 뱉기는 끝나지 않았다. 공책마다 그 애가 뱉은 침의 흔적이 남았다. 죽어라 이어지는 그 애의 만행에 나도 죽어라 괴로웠지만 선생님께 말을 못했다. 지극히 내성적인 나에게 그건 산을 옮기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산을 옮기는 게 더 낫다고 여겼을 테다.
침 뱉은 걸 발견할 때마다 ‘왜 그래!’라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눈이 찢어지도록 그 아이를 흘겨본 게 다였다. 그러면 그 애는 모르는 척 딴 데를 보았다. 아무리 침을 뱉어도 선생님께 이르지 않아 혼날 염려가 없으니 그 애는 마음껏 침을 뱉었다. 울상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꼴을 보는 게 그리도 재미있었던가? 그래서 목표물이 되었을까?
집에 가서는 말했지만 먹고 살기 바쁜 어른들은 ‘그러지 말라고 하지’ 라 할 뿐이었다. 그 아이의 악행이 무한 반복되어도 선생님도 모르고 부모님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으니 나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입학하자마자 시작되어 일 년 내내 계속된 그 일을 어떻게 참아냈을까? 그를 사랑하는 것이 내 일생이었다는 시구를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나는 그를 미워하는 것이 일생이었다. 증오라는 말은 몰랐지만 있는 힘을 다해 그 아이를 미워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면 몸에서 독소가 생긴다는데 그 때 내가 새까맣고 키도 크지 못한 게 그 때문인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 딸의 유치원 참관 수업에 갔을 때다. 스포츠 센터라 아이들은 매트가 깔린 바닥에 앉아 있었다. 시작하기 전의 어수선한 시간에 딸애는 앉은 채 상체를 앞으로 숙여 엎드리듯 하고 있었다. 자주 아프던 배가 아픈가 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한 남자애가 서서 발로 딸을 툭툭 찼다. 실내화 신은 발이다. 한 번도 못마땅했지만 곧 그만두겠지 했는데 다른 데 돌아다니다 와서도 차고 자꾸만 머리도 차고 옆구리도 찼다.
그런데 딸애는 일어나 같이 차지도, 하지 말라고도 않고 그냥 가만히 엎드려 있기만 했다. 떨어져 있는 학부모 석에서 그 광경을 보자 얼굴로 피가 확, 몰렸다. 무작스러운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바람피운 여편네처럼 반항도 없이 나 죽었소, 맞고만 있는 애를 보니 기가 막혔다. 그 때 공책에 침 뱉었던 애가 쑥 떠올랐다.
내 딸은 나와 똑같았다. 나처럼 당하고만 있었다. 침 뱉은 애 생각에 ‘가만있으니까 계속 때리지. 일어나. 때리지 말라고 해.’라 말해주고 싶은데 곧 시작할 것 같아서 아이에게 가지 못했다. 남자애한테 가서 그러지 말라고도 하지 못했다. 그 애 엄마도 봤을 테지만 자식이 맞는 쪽이 아니어서인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에 그 아이나 엄마에게 뭐라고 할까 했지만 엄마와 자녀들이 뒤엉킨 속에서 주춤거리다 놓치고 말았다. 나도 내 딸을 지키지 못했다.
집에 와서 아이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그 남자애는 딸애를 자주 때린다고 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계속 맞다 보니 그냥 맞으려니 했나?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아서? 집에서는 제 오빠가 조금만 건드려도 우는 소리를 하는 애가 유치원에서는 어째서 그걸 감수했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감수할 수 없었다. 아이 옆에 있던 그 애가 짝이라면 바꿔야 했다. 선생님께 전화했다. 내가 본 일과 아이가 해준 이야기를 하니 자신은 몰랐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교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선생님은 잘 모르고, 몰랐다 하면 그만이다. 딸은 겨우 6살이었는데, 아무리 어려도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건지. 지금도 다른 사람은 모르는 폭행을 당하며 참고만 있는 아이는 얼마나 많을까?
선생님이 아이의 짝은 바꾸어 주었지만 ‘하던 가락’으로 그 남자애는 우리 애를 만나면 괜히, 아무렇지도 않게 때릴 것 같았다. 아이에게 들어보니 그렇다고 했다. 딸애는 그 후로도 종종 맞고 산 것 같다. 바라건대, 그 남자애가 폭력 남편이 되지 않기를.
다시 세월이 흐르고 얼마 전, 오랜만에 초등 동창 밴드에 들어갔다가 그 애를 보았다. 침 뱉은 애 말이다. 새로 가입했다며 뜬 그 애의 이름,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을 보자마자 아악, 소리가 나왔다. 옆에 있던 딸이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애가 저지른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누런 침이 뱉어져 있는 연습장, 침으로 젖은 얇은 공책을 뻣뻣한 종이로 닦으며 찢어질까 조심하던 작은 손, 한사코 공책에 붙어 있으려는 듯 꼬리를 늘이던 끈적한 침. 닦아도 기분 나쁜 척척함, 그 더러운 침.
정신을 가다듬고 아이 때 얼굴이 남아있는 듯 마는 듯한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결혼은 했겠지, 하고 만약 딸이 있다면 같은 반 남자애가 혹시 딸을 괴롭히지 않는지 걱정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랬다면, 여덟 살 때 내 공책에 수시로 침 뱉었던 일을 기억하는지, 기억한다면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안다, 미안하다,라고 너무 쉽게 말해버릴까 봐서다. 그러면 말문이 막힐 것 같다. 안다는데, 미안하다는데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그러나 세월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그 애의 거듭된 나쁜 짓과 그로 인한 나의 괴로움이 그 한마디 말로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괴로웠던 날들을 보상해주지도 못한다. 나는 그의 죄를 탕감하지 않겠다, 해보지만 어차피 이렇게 되지 않을 테다.
대부분의 가해자처럼 그는 아마 나도, 자기가 한 일도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전혀 만날 생각이 없지만 어쩌다가 맞닥뜨려 그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도 그는 99.9%, 기억 못 할 테다. 기억한다면, 그래서 미안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밴드에 가입하자마자 나를 찾아 개별적으로 사과했겠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랬다면 미안하다.’라는, 현재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듣는다 해도 이제 와 달라질 게 있을까? 없다. 그만 잊어라, 한다고 잊히겠는가? 그 일이 생각나면 아직도 부르르, 치가 떨리는데. 까닭 없이 더러운 짓을 했던 그 애가 정말 싫고, 죄없이 당하기만 했던 자신이 너무 가엾고 딱해서 가슴이 아리는데.
이 글을 쓰며 생각한다. 침이 범벅된 종이를 찢어내어 들고 발딱 일어나 그 애한테 가서 종이를 그 얼굴에다 대고 팍 눌러버렸더라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기도 했다면, 그래서 큰 싸움이 되고 마침내 선생님도 경위를 알게 되었다면 같이 벌을 받았을지언정 다시는 침을 뱉지 않았을 거라고. 받은 침을 되돌려주며 초장에 화끈하게 해결하지 못한 게 참으로 한스럽다.
만에 하나, 침 뱉은 이유가 내가 마음에 들어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면 그 애는 천하의 바보다. 침 뱉는데 좋아할 여자는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