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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서

by 가을산

“사람도 봄이 되면 꽃처럼 새로 피면 얼마나 좋겠니.”

시어머님이 길 양쪽에 핀 붉고 흰 철쭉을 보며 말씀하셨다. 큰 따님을 갑자기 여의신 이듬해였다. 철쭉이나 영산홍을 볼 때마다 그 말씀이 생각난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중2 가을부터 고1 말까지 TV에서 한 만화, <캔디>를 즐겨 보았다.

방영 시간은 월요일 저녁 6시였다. 집이 교외에 있어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던 짝도 <캔디>를 무척 좋아했다. 월요일에 학교에서 좀 늦게 마치게 되면 <캔디>를 못 보게 될까 봐 애를 태웠다. 버스에서 내렸더니 6시가 다 되어 집까지 전속력으로 뛰어갔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다음 날 학교에 오면 어제 <캔디>에 푹 빠졌노라고 말했는데 그때껏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캔디>에 열광했다. 화요일의 학교 교실에서는 온통 <캔디> 이야기뿐이었다. 어제 캔디가..., 어제 이라이저가..., 어제 스테아가, 아치가... 할 말이 무궁무진했고, 했던 말도 무한 반복했다. 안소니가 너무 멋있었다고, 닐이, 이라이저가 너무 미웠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방영 시간이 25분에 불과한 게 참으로 아쉬웠다. 1주일을 목 빠지게 기다려서 고작 25분이라니. 감질나 죽을 지경이지만 다시 목 빠지는 한 주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단 25분으로 <캔디>는 일주일 내내 전국의 소녀를 울고 웃게 했다.

소년들은 <캔디>에 관심이 없었던가? <캔디> 얘기하는 남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 주위의 소녀들에게 캔디는 가상의 아이돌 스타였다. 모두가 팬클럽 회원이었다. 팬으로서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목을 늘이고 기다리다 만화를 봐줄 뿐.

교복을 입었던 학생 시대의 한가운데 <캔디>가 있었다. 힘들거나 슬플 때면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캔디> 노래를 불렀다. 축 처져 있다가도 달력에 그려진 캔디의 웃는 얼굴을 보면 마음이 밝아졌다. 캔디는 좋은 친구였다.

어떤 애가 캔디는 남자 복도 많아, 라고 할 때 그 말이 몹시 거슬렸는데 거기 나오는 모든 남자가 캔디를 좋아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 캔디는 고아지만 명랑 쾌활하고 당당했으며 용감했다. 나도 그런 아이가 되고 싶었다. 캔디가 나의 롤 모델이었던가?


높은 인기에 TV에서는 <캔디>를 두 번이나 방영했다. 두 번째는 2회씩 묶어서 한 번에 50분씩 일요일 아침에 했다. 전부 아홉 권인 만화책도 발간되어 몇 번이나 보았다. 속편도 나왔는데 작가가 쓴 것 말고도 여러 편이 있다고 한다. 독자의 다양한 희망 사항을 반영해서다. 원래 작가는 일본인인데 우리나라 작가가 쓴 속편 소설까지 있었다. 나는 그걸 보았다. 내 희망대로 된 결말이고 그걸 확인하려고 봤지만 어딘가 억지스러웠다. 보고 나니 내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고, 남의 작품 뒤를 이렇게 마음대로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배우가 나오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최선아가 캔디로 나오고, 테리를 태일이라고 불러 전혀 테리우스의 느낌이 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캔디> 열풍이 분 뒤로 순정 만화가 쏟아져 나왔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 <유리 가면> 등. 다 섭렵했다. 공부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만화책 보기에 매진했다. 주인공에게 과하게 감정 이입을 하여 정신을 못 차렸다. 겨울 방학이면 동생과 작당하여 한 보따리씩 만화를 빌려다 보곤 했다. 그렇게 버린 시간이 얼마런가 싶지만 본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만화가 내 감성을 진하게 키워줬다고 생각한다. 그래, 나는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장래 희망이 만화가인 딸이 교과서마다 만화를 그려대고 독서록까지 만화로 그릴 때는 왜 야단쳤는고?

캔디가 여섯 살 때 만난 ‘동산 위의 왕자님’을 닮은 안소니는 장미를 가꾸는 귀공자였다. 새로운 장미의 품종을 개발하여 ‘스위트 캔디’라는 이름을 붙여 캔디에게 주었다. 예쁘게 핀 장미꽃이 지는 것을 보고 캔디가 안타까워하자 안소니는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며 자신의 엄마가 해준 말을 들려준다.

“꽃은 져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고 사람은 죽어서 사람의 마음속에 더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거야.”

둘은 서로 좋아하게 되지만 여우 사냥하던 날 안소니가 탄 말의 발이 덫에 걸렸다. 말이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안소니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크나큰 슬픔에 빠졌던 캔디는 안소니가 한 말을 떠올리고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스테아가 죽었을 때도 그 말을 떠올리며 슬픔을 다스린다. 그들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한 나도 누군가와 사별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고 눈물을 삼켰다. 잊지만 않으면 마음속에 되살아난 사람은 영원히 살아있을 터였다.

긴긴 겨울 끝에 매화가 수줍게 눈을 틔운 걸 발견하면 곧 봄이 오리라는 예감에 마음이 들뜬다. 산수유, 매화가 자잘한 꽃을 피우고 촛대 같던 목련의 꽃봉오리가 활짝 벙글어지고 나면 기다리던 날이 온다. 온 누리에 연분홍 벚꽃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중 가장 아름다운 때가.

그날들은 길지 않다. 꿈속 같은 풍경에 어릿어릿하는 동안 만개한 벚꽃은 사뿐히 몸을 날린다. 낙화암의 삼천 궁녀보다 많은 꽃이 떨어진 낙화로가 여기저기 굽이친다. 꽃비를 맞고 꽃길을 걸어가며 벚꽃 핀 때를 한껏 즐기지만 자꾸 떨어져 날리는 꽃을 보면 곧 다 져버릴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쓸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꽃이 피는 건 지기 위해서다. 꽃이 져야 새로 꽃이 핀다. 애달파하지 말고 화려한 공연을 펼치고 떠나는 벚꽃을 위해 박수를 보내자.

사람도 자연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몸을 구성했던 산소나 수소, 탄소 등의 원소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천 년 전 카이사르의 몸속에 있던 산소가 우리 콧구멍 속으로 들어왔다 나갔을 수도 있다고 과학자는 말한다. 그럼 세종 대왕이나 유관순의 몸속에 있던 산소도 내가 들이마셨을지 모른다. 악을 쓰고 싸운 원수는 가까이 있었으니 더 많은 산소를 주거니 받거니 했겠다.

원소는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순환한다고 한다. 위로가 되지 않는가? 내가 죽어도 내 몸을 이루었던 원소는 이 세상 어딘가에 계속 남아있는단다. 그렇다면 죽어도 아주 죽는 건 아니다. 안소니가 한 말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한 죽은 사람은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뜻일 텐데 물리적으로도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매화나무에는 이듬해 봄에도 다른 꽃이 아닌 매화꽃이 피지만 떠난 사람은 꽃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오지는 않는다. 그 몸에 있던 원소는 어디선가 다른 모습 이를테면, 수국이나 노랑나비의 몸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났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족이나 친한 사람과의 이별도 미칠 듯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날마다 지나다니는 길에 피어있는 하얀 철쭉이 돌아가신 엄마가 나를 보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하면, 등산하다 잠시 기댄 바위 옆의 큰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가 아버지라고 하면, 내 얼굴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바람이 몇 해 전 갑자기 떠난 큰언니라고 하면 그들이 지켜보는 내 세계가 더없이 든든하게 여겨진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그들의 배려로 나는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다. 그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지 않다.

그 후로 꽃과 풀, 나무들을 예전보다 더 찬찬히 들여다본다. 거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로 나를 보려고 미리 와서 자리 잡고 기다렸던 건 아닐까 싶어진다.

벚꽃이 진다고 슬퍼할 필요 없다. 내년에 다시 필 테니까. 혹 내년에 피는 벚꽃을 내가 볼 수 없다 해도 슬퍼할 필요 없다. 내가 벚꽃으로 피어날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죽는다고 완전히 소멸하는 건 아니다. 어딘가에서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테니까. 훗날 내 몸속에 있던 원소가 무엇을 이루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캔디가 안소니를 잃은 슬픔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준 테리와 캔디는 서로 좋아하게 되나 테리를 좋아하는 이라이저의 계략으로 함정에 빠져 헤어지게 된다. 뒤늦게 부둣가로 달려온 캔디는 테리가 탄 배가 떠나는 걸 보고 ‘테리! 테리!’ 목이 터져라 부르며 운다. 그 모습을 본 한 할아버지가 인생에는 이별이 따르게 마련이라며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만난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 말대로 캔디와 테리는 다시 만났고 또, 헤어졌다.

살아있어서 언젠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 본다. 다음 생에 꽃과 나비로 다시 만난다 해도 지금 이 모습, 이 영혼으로 다 만나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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