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고입 모의고사를 보고 난 다음이다. 물상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이 돌대가리들아!’ 하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다. 돌대가리도 못 된다. 돌은 단단해서 한 번 들어가면 안 나오기라도 하지. 너희는 호박 대가리다. 호박처럼 물렁물렁해서 들어갔다가도 금방 나와 다 잊어버리지. 이 호박 대가리들아!”
시험을 좀 못 봤다고 어엿한 인간인 우리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할까? 아무리 모의고사가 우리 학교의 대외적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라 담당 교사의 체면이 달렸다고 해도 말이다.
1학년 때 여자 수학 선생님은 우리가 성 대신 ‘악’자를 붙여 ‘악oo’라 불렀을 정도로 선하지 않았다. 월말고사 후 첫 시간, 입장하는 선생님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차렷, 경례, 하는 반장의 구령에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했더니 ‘안녕 못 해!’라고 화난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반이 수학 시험을 엄청 못 본 모양이었다. 수학 선생님은 우리 반이 다른 과목은 거의 다 1등인데 왜 수학만 꼴찌냐고, 자신을 무시하느냐며 악에 받친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 반은 주요 과목이 아닌 체육 선생님 반임에도 시험 때마다 1등 했다. 집에 빨리 가면 뭐하냐며 담임 선생님이 매일 방과 후에 한 시간씩 자습하게 한 덕분인가 보았다. 남자 선생님이 어려워 규율을 잘 지켰던지 수업 분위기가 좋다고 다른 선생님들도 우리 반을 많이 칭찬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달에 수학은 왜 꼴찌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 날의 매는 그 어느 때보다 매웠다. 선생님의 회초리는 신이라도 내린 듯 미친 듯이 허공을 갈랐다. 벌겋게 줄이 간 손바닥을 보며 자기 반이 수학 시험에서 1등 하면 됐지 우리 반이 꼴찌인 게 대체 무슨 문제인가, 했다.
우리는 반 전체 평균으로 1등 하는 것에 관심도 없었다. 축구 시합이 아니므로 내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우리 반이 1등인 건 아무 의미가 없고 기쁠 것도 없었다.
시험을 보고 난 다음 날에도 선생님은 우리를 일찍 보내지 않았다. 그런 날 중 심심한데 한 사람씩 노래나 불러 보자고 한 날이 생각난다. ‘1번부터!’라고 해서 내가 제일 먼저 불러야 했다. 마침 ‘음악’이 든 날이라 음악책을 꺼내 첫 장부터 넘기며 고음이 적고 부르기 편한 노래를 골랐다. ‘노래는 즐겁다’를 불렀다.
학교가 시내에서 멀어 학교 버스가 있었다. 학교까지 오는 길에 학교가 여럿이라 버스 타기가 전쟁이었다. 그래서 학교 버스 타는 장소가 우리 집에서 좀 떨어져 있었지만 타겠다고 신청했다. 큰오빠가 버스 타는 곳을 지나서 있는 대학의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였다. 매일 아침 오빠와 같이 집에서 나와 버스 타는 데까지 함께 갔다. 그 지점에 도착해도 오빠는 바로 가지 않고 버스가 와서 내가 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어떤 날 종종 거기서 학교 버스를 타고 가는 수학 선생님이 한쪽 옆에 서 있는 오빠를 흘낏 쳐다보았다. 오빠도 쳐다보았다. 서로 모르니 목례 같은 건 없었다. 선생님은 누구와 관계있는 사람인지 알아보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줄에 서 있던 나는 시침 떼고 선생님도, 오빠도 쳐다보지 않았다.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오빠는 처음 보는 사람도 눈길을 줄 정도로 잘 생기고 좋은 사람인데 악독하고 예쁘지도 않은 수학 선생님과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중학교에 가니 위로는 2학년뿐, 3학년이 없었다. 나는 우리 학교 2회 입학생이자 2회 졸업생이다. 신설 사립 학교여서 초임 선생님도 많고 대부분 미혼의 젊은이들로 혈기 방장했다. 의욕이 많아서라고 할까? 왕성한 혈기로 학생을 다루었다.
매를 많이 맞았다. 시험을 보고 나면 교실마다 ‘타작’ 소리가 요란했다. 공부하다가도 옆 교실에서 착, 착, 나는 매서운 소리를 들으며 공포에 떨었다. 매를 맞고도 예방 주사라도 맞은 듯 씩 웃으며 들어오는 애는 어찌 그리 용감할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맞기 전에는 간이 오그라들었고 맞고 나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절로 났다. 잘못 맞으면 손가락이나 엉덩이뼈가 오래 아팠다. 뼈가 아닌 곳은 멍이 들어 일주일은 푸르딩딩했다.
선생님들은 무자비한 매질도 ‘사랑의 매’라고 했다. 어느 선생님의 교편에는 숫제 ‘사랑의 매’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걸 우리에게 내밀어 보여주는 선생님의 얼굴은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한다는 증거라도 대듯 의기양양했다.
3학년 때 수학 선생님은 손바닥 두께만 한 ‘빳다’를 들고 다녔다. 그것도 ‘사랑’이라고 했다. 매시간 ‘너!’ 하고 아무나 지적해서 수학 공식을 묻고는 대답을 못하면 그걸로 위팔 부분을 찰싹찰싹 때렸다. 수학 시간 전 쉬는 시간이면 모두가 웅얼웅얼, 삼각비나 피타고라스 정리 등을 외우느라 바빴다.
수학 선생님이 월남에 갔다 왔다며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월남 꽁까이(딸, 아가씨)에게 한국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대개 성은 생략하고 이름의 받침도 떼고 부른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꽁까이가 볼 때마다 자신의 이름에서 받침을 떼고 ’여보’, ‘여보’ 했다는 이야기다.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을 명제라고 배웠는데 선생님이 월남에 갔다 왔다는 말과 그 이야기는 참인 명제일까? 우리로서는 진위를 알 수 없으니 명제가 아닌 걸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우리는 수학 선생님을 ‘여보 선생님’이라 불렀다.
중 2 담임 선생님은 초임으로 이상적인 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우리가 맞춰주지 않았다며 돌변했다. 처음에는 본인도 상상을 못 했겠지만 우리에게 ‘이것들이!’라는 말도 쉽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대우하려 해도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니 할 수 없다.’가 선생님이 변한 이유였다. 다른 선생님도 같은 이유로 그렇게 대했을까? 우리는 물건 취급받는 게 몹시 기분 나빴지만 선생님들은 개의치 않았다. 선생님들은 우리를 함부로 대했다. 언어폭력과 모욕하기는 늘 있는 일이었다.
참도 이상하지. 선생님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었다.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든, 굵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패든, 벌로 운동장 열 바퀴를 돌리든, 오리걸음을 시키든, 딱딱한 출석부로 머리를 후려치든 뺨을 갈기든 그 어떤 행동도 우리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 모든 행위를 오로지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 성의있게 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해야 했다. 붕어빵 속에는 붕어가 없어도 ‘사랑의 매’ 속에는 사랑이 있다고 믿어야 했다.
먼저 어른 된 사람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는 줄 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라서 심하게 대해도 금방 잊어버릴 거라 믿는다. 착각이다. 아이들도 안다. 누가 좋은 선생님이고 누가 격이 떨어지는 사람인지. 어느 선생님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어느 선생님이 자신을 멸시했는지. 혹 그 당시에는 몰랐더라도 성장해서 돌아보면 다 안다. 그리고 잊지 않는다. 선생님이 보여준 미소와 냉소까지 다 기억한다.
우리가 졸업한 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빳다’를 들고 다니던 수학 선생님과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꽁까이의 ‘여보’가 우리 선생님의 ‘여보’가 되다니. 담임 선생님이 수업을 끝내고 나간 어느 날, 아이들이 선생님의 옷이 구겨졌다며 수학 선생님과 포옹해서 그렇다고 떠들어댄 적이 있다. 담임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수학 선생님보다 낫다고 생각했기에 ‘설마, 말도 안 돼.’ 했는데 아이들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물며 사랑의 기미를 놓치랴! 선생님들은 서로 사랑하고 우리도 넘치게 사랑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오롯이 감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