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를 배우고 싶었으나 독어를 배우게 되었다. 내가 입학한 해부터 우리 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를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지 않고 홀수 반은 독어, 짝수 반은 불어를 배우게 했다. 나는 홀수 반이었다. 프랑스와 불어에 대한 환상으로 고등학교에 가서 불어를 배울 날을 목 빠지게 기다렸던 나는 몹시 실망했다. 독어는 전혀 배우고 싶지 않은 언어였다. 독일이라는 나라도 싫고 영화에서 접한 독일어는 군홧발 소리처럼 딱딱하고 기괴했기 때문이다.
첫 시간에 독어 선생님이 불어를 배우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다. 독어와 불어 수업을 같은 시간에 하므로 옆 반에 가서 배우게 해주겠다는 거다. 독어 선생님이 좋아 보인 데다 그렇게 배려해 주니 오히려 당신 수업을 듣지 않겠다고 하기가 미안했다. 헤르만 헤세 같은 작가, 칸트나 니체 같은 철학자, 베토벤 같은 음악가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긴 독일인이 많아서 어느 방면으로 가든 독어는 필요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는 말에도 흔들렸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반드시 불어를 배워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말하지 않았다. 독어 시간에 불어를 배우러 옆 반으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배웠지만 독어도 나쁘지 않았다. 교실에서 만난 독어는 유대인을 탄압하고 학살하는 영화에서 들었던 것과 달랐다. 선생님이 가지고 오신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온 독어는 아주 부드러워서 놀랐다. 독어뿐 아니라 어떤 언어라도 사람을 괴롭히거나 죽일 때 쓰인다면 어찌 듣기 좋겠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면 어찌 부드럽고 달콤하지 않을까. 화가 나서 있는 대로 소리 지르는 사람의 한국어는 외국인에게 엄청 무섭고 기괴하게 들릴 테다.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수많은 젊은이가 자살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나 책에 쓰인 독어가 그만큼 아름다워서가 아니겠는가.
독어에 대한 선입견이 조금씩 사라지니 새로운 말을 배우는 게 다시 재미있어졌다. 복잡한 격 변화를 외우는 일까지 재미있었다. ‘데어 데스 뎀 덴, 다스 데스 뎀 다스, 디 데어 데어 디, 디 데어 덴 디’. 세 가지 성에 따라 또 복수일 때, 격마다 다른 정관사의 형태가 아직도 구구단처럼 줄줄 나온다.
독어는 처음 배운 외국어인 영어보다 발음하기 쉬웠다. 나중에 불어를 배울 때는 도저히 안 되는 발음 때문에 절망하기도 했는데 독어는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이 독어는 발음하는 법을 한 번 익혀 놓으면 처음 보는 단어라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독어는 알파벳의 음가를 그대로 내며 써놓은 철자를 빠뜨리지 않고 다 읽는다. 불어처럼 써놓고 소리 내지 않는 자는 없다. 어느 언어학자는 그걸 정직한 언어라고 표현했다.
나는 독어에 특화된 발음 기관이라도 가진 양 독어 읽기가 편했다. 편하니 자주 읽었고 자연히 독어가 좋아졌다. 수업 시간에 호명되어 교과서의 본문을 읽었을 때 아이들이 화~ 하고, 선생님이 잘 읽었다고 칭찬하신 기억이 난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부르거나 그날 날짜와 같은 번호를 부른 선생님들과 달리 독어 선생님은 모두가 빠짐없이 발표할 수 있도록 교무 수첩에 발표한 사람을 표시해 두었다.
첫 시험인 중간고사에서 99점을 받았다. 출석 번호순으로 점수를 불러 주었는데 내 점수를 듣고 또 애들이 와~ 했다. 나는 속으로 왜 100점이 아닐까 했는데. 제2 외국어는 대입 시험 과목에 들어가지 않아 대부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데 나는 좋아서 한 것뿐이다.
독어가 재미있어서 독문과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주 친하지는 않았던 고1 때 친구가 나한테 독문과가 어울린다고 하자 부정적인 해석이 전문인 나는 내가 독일 사람같이 재미없어 보인다는 뜻인가, 했다.
우리 독어 선생님은 독어 선생님같이 생겼다. 자그마한 체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선생님은 수수하고 차분했으며 할 일은 꼭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불어 선생님 같지는 않았다. 불어 선생님은 화사했다.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불어 선생님이 옆 반에서 수업하고 가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귀여운 용모에 늘 웃는 얼굴이던 선생님은 인생이 즐거운 사람 같았다. 선생님이 발하는 불어는 들어보지 않아도 어떨지 짐작되었다. 꿀을 바른 듯 매끄럽고 높은 음표처럼 통통 튀었으리라.
“노흐 아인말 다스 젤베!”
수업 시간에 읽었던 본문의 제목이다. 내용도 생각난다. 독어를 못 하는 외국인이 독일의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해 먹었는데 맛이 없었다. 옆의 탁자에 있는 사람은 아주 맛있어 보이는 걸 먹어서 부러웠다. 그 사람이 그걸 다 먹고 ‘노흐 아인말 다스 젤베!’ 라 하자 한 번 더 그 음식을 갖다 주었다. 저 음식의 이름이 ‘노흐 아인말 다스 젤베’구나, 하고 종업원을 불러 그대로 말했더니 자신이 맛없게 먹은 음식을 또 갖다 주는 게 아닌가.
그는 몹시 낙심했다. 똑같이 말했는데 왜 저 사람한테는 저렇게 맛있는 음식을 주고 자신에게는 푸른 콩이 든 이 맛없는 음식을 갖다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바룸 이스트 다스 조?’(‘그것은 왜 그럴까?’), 이것이 마지막 문장이다. ‘노흐 아인말 다스 젤베’는 짐작하는 대로 ‘똑같은 거로 한 번 더’라는 뜻이다.
오래전,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찾아오는 두통이 낫질 않아 신경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마음의 병인가 하여 지난날을 되짚어볼 때 문득 이 문장이 떠올랐다. 똑같은 일을 한 번 더 겪는 것 같아서였을 테다. 니체가 한 말이자 전혜린의 유명한 수필집 제목인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도 새삼 눈에 들어왔다. 살다 보면 ‘똑같은 걸 한 번 더’ 할 때가 꽤 있다. 크든 작든 기쁜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그중 똑같은 괴로움을 한 번 더 겪게 됨은 두 번째는 제대로 해보라고 신이 주는 기회일까?
시험을 보고 난 다음에는 시험 문제 풀이를 한 뒤 선생님이 독어로 된 노래를 한 곡씩 가르쳐 주셨다. ‘이게 독일 노래였다고?’ 할 만큼 우리 말로 잘 부르던 노래였다. 가사만 독어로 바꾸면 되는데 음정과 가락에 맞춰 발음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맨 처음에 배운 노래는 이것이다.
“무시 덴 무시 덴 춤 쉬테텔레 힌아우스......”
무슨 노래일까? 지금도 처음과 중간의 여러 부분이 쉽게 술술 나오는 이 노래를 집에서 얼마나 무시로 ‘무시 덴 무시 덴’ 했던지 불어를 배운 언니는 ‘아이고 무시라. 그만 좀 해라. 무슨 노래가 무시로 다 시작되나’ 했다. 무시는 무의 사투리이기도 한데 무시가 두 번 반복되니 무서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노래의 우리 말 제목은 ‘노래는 즐겁다’이다. 곡조는 밝은데 원어가 그리 무시무시하다니. 독어가 좀 무섭긴 한가 보다.
‘노래는 즐겁다’, ‘들장미’, ‘로렐라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때 독어로 배운 노래들이다. 한 해에 두 번씩 있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마다 배웠다면 딱 1년 치 분량이다.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더는 생각나지 않으니 2학년 때는 안 가르쳐 주셨던가? 그때 쓴 독어 공책은 소중한 레퍼토리를 안고 세월의 강에 떠내려가 버렸으니 알 수가 없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2학기 기말고사 후에 배웠다.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공책을 보며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쉬틸레 나크트 하일리게 나크트 알레스 쉴레프트 아인잠 바크트’
지금도 눈이 많이 내린 밤이나 크리스마스 무렵, 창가에서 색색으로 깜빡이는 불빛을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며 이 노래가 고요하게 흘러나온다.
고2 2학기부터는 독어 시간에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아이가 생겼다. 대입 시험 과목이 아닌 걸 공부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여겨서였을 테다. 순서가 되면 발표는 시켰지만 선생님이 뭐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하지 않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갈 필요가 있겠는가. 나도 예전만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시험 때면 독어 공부도 좀 했다. 입시에 반영되는 내신에 제2외국어가 들어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독어를 완전히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독어를 못하니 그 때 공부하지 않은 아이들과 결과는 같다.
나도 교과서 밑에 만화책을 펴놓고 본 적이 있다. 당시 인기 있던 만화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얼른 보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웬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인데 오늘은 눈도 안 마주치고 대답도 잘 안 하고 아래만 보고 있네, 라고 선생님이 생각하셨을까? 선생님을 속이고 다른 책을 본 일이 지금 생각해도 죄송하다.
십여 년 전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독어를 다시 만났다. 오랜만이라 정말 반가웠다. 간판이나 책자에 씌어있는 글자를 자꾸자꾸 읽고 싶었다. 같이 간 아이들에게 눈곱만큼 알고 있는 거라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썼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에 세워놓은 팻말에서 일요일에는 그 버스가 운행되지 않는다는 걸 해독하자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 후에도 독일은 제대로 가보지 못했다. 언젠가 가게 되려나?
독어 수업을 시작할 때는 선생님과 ‘구텐 탁!’ 또는 ‘구텐 모르겐!’ 하며 인사하고 끝날 때는 ‘아우프 비더젠~’ 하고 인사했다. 불어는 ‘봉주르~’ 라고 인사하는데 ‘구텐 탁’이라니, 누구 말대로 ‘구둣발로 탁!’ 인가, 하고 처음에는 그조차 싫어했는데 자꾸 하다 보니 그 인사도 친근해졌다.
2학년 여름이었던가. 임신한 독어 선생님이 머리가 조금 벗어진 남편과 나란히 학교 앞 건널목을 건너가던 모습이 생각난다. 출산해도 그렇게 오래 쉬지는 않았을 텐데 2학년 마지막 독어 시간에 또 보자며 ‘아우프 비더젠~’ 하고 헤어진 뒤 다시는 선생님을 보지 못했다. 3학년 교실이 떨어져 있어서였을까? 졸업 앨범에는 남아있는 독어 선생님과 만나 ‘구텐 탁!’ 인사할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