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노래 자랑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씩 나와서 노래 부르다가 땡, 소리가 나면 꾸뻑, 인사하고 들어갔다. 땡, 소리는 연신 울렸다. TV 방송이 아니다. 여기는 고등학교 교실. 학생들이 음악 실기 시험을 보는 중이다. ‘땡’은 선생님이 맨 뒷자리에 앉아 교편으로 책상을 치는 소리다. 출석번호 1번부터 차례로 나가서 부르되 땡, 치면 그만 부르라고 했다. ‘딩동댕~’은 없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1주일에 한 번씩 든 음악 시간은 대학 입시의 중압감에 짓눌린 우리에게 한 줄기 숨구멍이었다.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로 가서 온 세계의 명곡을 마음껏 불러보는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사월의 노래, 라르고, 핀란디아, 신세계 교향곡 등 많은 노래를 배웠다. 둥근 레코드판으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과 슈베르트의 ‘마왕’을 감상하기도 했다.
음악 선생님은 명문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에,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작곡과를 나왔다는데 자유자재로 노래를 잘 불렀다. 흥이 나면 그날 가르칠 노래뿐 아니라 이 노래, 저 노래 막 불렀다. 응원전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불렀다는 응원가도 부르고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도 불렀다. 대체로 음악적 소양이 부족하고, 공연을 볼 기회도 거의 없던 우리는 선생님의 몸짓과 노래에 흠뻑 빠져들었다. 음악실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뒤로 갈수록 좌석이 높았다. 아이들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며 흥에 취해 공연하는 선생님의 ‘원맨쇼’를 부담 없이 즐겼다. 실기 시험 부담만 없다면 완벽했을 텐데.
1학년이 되자마자 열린 첫 번째 노래 자랑은 교내 합창반원을 뽑기 위함이었다. 선생님은 ‘기회는 균등하고 결과는 정의롭게’를 실천하고 싶었던가? 모두에게 기회를 주니 공평하기는 하지만 합창반에 관심 없거나 노래를 잘 못하는 아이에게는 불필요한 고문이었다.
두어 주 전에 배운 현제명의 ‘오라’를 불렀다. 대개 한두 소절을 부르면 땡, 소리가 났다. 한 소절 불렀는데 나기도 했다. 누구나 부르는 사람이 되고 듣는 사람도 되건만 듣는 사람일 때는 부르는 사람의 실수가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다. 땡, 소리만 나면 웃었고 한 소절 만에 나면 더 크게 웃었다. 첫 음을 발하자마자 땡, 하면 선생님이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터지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한 음절로 ‘땡’처리가 됐으니 부른 애는 얼마나 창피했으랴.
긴장하고 초집중한 탓에 땡, 소리가 났는데도 모르고 계속 부르는 아이를 보면 땡, 할 때 웃고도 또 나오는 웃음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웃음소리에 긴가민가하며 노래를 이어가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연거푸 땡, 땡, 치면 우리도 책상을 치며 웃었다. 우리는 웃기쟁이였던가? 땡, 소리가 나지도 않았는데 난 줄 알고 지레 노래를 그치는 아이도 있었다. 그때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구나, 하고 이어서 부르는데 바로 땡, 하면 또 얼마나 웃긴지.
사실 갖가지 모양으로 웃게 하는 그 일은 곧 자신에게도 일어날 일이어서 웃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서에 손이 떨리고 배가 아팠다. 목이 꽉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노래 시험은 남에게는 개그, 나에게는 공포였다.
‘목동은 밭 갈고 처녀는 베 짜서 기쁘게 살도록 오라 오라 오라 오라’
노래의 중간인 이 대목부터 불렀는데 나는 땡, 소리 없이 끝까지 불렀다. 다 부르고 나자 아이들이 와~ 하며 손뼉을 쳤다. 잘 불러서가 아니라 8번인 나까지 부르는 동안 ‘땡’ 없는 애가 처음 나왔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뭔가 좀 부족했다는 느낌이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여겼을까? 음정을 틀리지 않아서 땡, 할 기회를 놓쳤지만 날 붙일지 말지 고민했던가? 심사가 끝난 뒤에 새 합창반원이라며 발표할 때 앞번호인데도 맨 뒤에 내 번호를 불렀다.
합창반이 될 기회를 전체 아이들에게 준 건 좋았다. 희망자를 모집한다고 했으면 내 실력을 알고 수줍음이 많은 내가 내 발로 찾아가 오디션을 받지는 않았을 테다. 그런데 선생님은 명쾌하지 않았다. 합창반으로 모인 첫 시간부터 어느 때가 되면 이 인원 중에서 새로 선발할 거라고 했다.
정해진 극에 출연할 가수를 뽑는 것도 아니고 전국이나 세계 합창 대회에 나갈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대단한 정예를 뽑겠다는 건지.
새로 뽑을 거면 얼른 뽑든가. 다음 달에, 5월에, 6월에, 2학기에는 다시 뽑는다고, 1학기 내내 말만 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내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른 게 걸렸다. 새로 뽑는다면 떨려날 것 같은 생각에 차라리 빨리 결정 났으면 했다. 그러나 2학기에 들어서고도 10월 중순이 되어서야 그 일은 매듭지어졌다.
우리 학교는 시립이었다. 모든 기념일에 시에서 주최하는 기념식에 참석해서 기념일 노래를 불러야 했다. 현충일, 제헌절, 광복절 등 기념식마다 가서 아무 학교 합창반으로서 기념일 노래를 불렀다.
한 해의 마지막 기념일인 한글날까지 10월의 모든 기념식 행사에 다 참석한 다음, 오디션을 치렀다. 합창반 반주자가 피아노로 음을 치게 한 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핀 장미화’를 부르라고 했다. 왠지 열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해도 안 될 것 같아서였을까? 정성 들여 고음을 내지 않고 적당히 낮춰서 대강 불렀다. 우리더러 베토벤도 내지 못한 음을 낸다는 말을 잘했던 선생님께 음치로 보였을지 모른다.
예상대로 다시 선발되지 못했다. 줬다 뺏으면 더 기분 나쁜 법이다. 미흡하면 처음부터 뽑지 말지. 1년 가까이 기념식 노래 봉사도 하게 해놓고 기념일이 다 끝나자 내치다니. 탈락자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반장과 반주자가 그대로인 것만 안다. 더 한다 해도 활동할 기간은 1년 남짓이지만 어릴 적 교회 성가대에서부터 지휘자를 보며 합창하는 걸 좋아했기에 좀 아쉬웠다. 합창반에 먼저 속했기에 학년 초에 정하는 다른 특별 활동 부서에 들어갈 수 없는 점까지 더해 선생님의 처사는 더 아쉬웠다.
2학기 실기 시험에서 다시 ‘오라’를 불렀다. 합창반 뽑을 때 불렀던 노래를 또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아직 합창반인 줄로 아는 아이와 이제 아닌 걸 아는 아이가 함께 있을 터였다. 그게 신경 쓰였지만 합창반이 아니니 기대만큼 잘 부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합창반 탈락자답게 잘 못 부르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온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다 부르기는 해도 처음 불렀을 때보다 못 불렀다.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을 테다.
선생님은 자신을 ‘박 베토벤’으로 불러주길 바랐다. 몇 해 전 인기 있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 마에’ 같은 머리 모양만은 확실히 베토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머리 모양만으로 베토벤이라 불러주기는 아까웠던가? 선생님이 우리 점수를 매기듯 우리도 선생님의 점수를 매겼다. 선생님이 그랬듯이 우리가 매기는 점수도 마냥 후하지 않았다.
소풍 갔을 때 음악 선생님이 ‘두만강 푸른 물에...’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음악 선생님이 부르는 트로트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음정, 박자, 발음 모두 정확하여 듣기 좋았다. 노래할 때 ‘딕션’이 중요하다고 한 게 생각났다. 그때만은 선생님도 겸손하게 1절만 부르고 여기까지만 하겠다, 불러줘서 고맙다고 했다. 음악 선생님이라고 있는 대로 기량을 뽐내어 다른 선생님들을 기죽이지 않는 점이 좋게 보였다.
2학년 때는 베토벤의 ‘그대를 사랑해’가 시험 곡이었다. 다시 선생님은 ‘땡’ 망치를 들고 교실 맨 뒷자리로 올라가고 우리는 한 사람씩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 선생님의 공연을 볼 때와 반대였다.
교탁 앞에 서서 고개를 들면 선생님과 아이들이 높은 데서 일제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광경에 질려버린다. 차라리 고개를 들지 말고 자리를 잡고 선 뒤에는 들고 나간 음악책을 펴서 보는 게 낫다. 시험 볼 때는 반주도 없다. 첫 음도 모른다. 절대 고독 속에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해야 한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깊게 내쉰 뒤 입을 벌린다.
‘사랑이여 우리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서로서로 근심 걱정 나누며 살아왔네’
여기까지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침에도’에서 벌써 땡,이 나왔고 ‘서로서로’에서도 나왔다. 그리고 ‘근심...’하다 대부분 ‘땡’을 맞는다. ‘근’이 반음 올려야 하는 음인데 대다수가 그렇게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거기서 무너졌다. #이 붙어 있는데 왜 평소처럼 제대로 지켜서 부르지 않았을까?
‘사랑이여 우리들은’만 예순여섯 번 들었다. 베토벤도 내지 못한 음을 내고 시작도 못 한 사랑이었다.
이어지지 못한 노래를 이어서 불러본다. ‘그대는 나의 생명 온갖 즐거움’ 까지. 눈앞에 고등학교 음악실이 둥실 떠오른다. 높은 좌석에 앉아 ‘땡’ 망치를 든 선생님과 터질 듯한 웃음을 물고 있는 하얀 옷깃의 여학생들. 아침에도 저녁에도 서로서로 근심 걱정을 나누던 열일곱 살 친구들의 얼굴이 선하다. 온갖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과 내내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