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그 같았다. 네모난 얼굴에 부릅뜬 눈, 깊이 파인 입가 주름, 오십 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은 몹시 완고해 보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맞는 담임 선생님인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쩐지 한 해가 편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교칙에다 자신만의 규칙을 더해 우리를 강하게 옥죄었다.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 얼굴인데 규칙을 어기는 아이가 있나 보느라 큰 눈을 굴려 레이저처럼 여기저기 쏘아댔다. 걸리면 가차 없었다.
선생님이 정한 규칙 가운데 학교에 낼 게 있으면 기일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게 있었다. 공납금의 경우, 납기일 한참 전부터 한 사람씩 불러 언제 가져올 거냐고 묻고 그 날짜를 교무 수첩에 적었다. 적어놓은 날짜에 내지 않으면 또 불러서 왜 안 냈느냐고 추궁하고 다시 낼 날짜를 받아적었다. 31일이 기한이라면 그날까지 내라고 하면 되지 24일이요, 27일이요, 미리 날짜를 받아둘 필요가 뭐가 있는가. 우리 집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기한에 맞춰 내고 싶었지만 여러 번 시달릴 게 피곤해 나는 기일 전날 날짜를 대곤 했다. 졸라대는 나 때문에 아버지가 대신 피곤하셨을 테다.
선생님은 날짜를 적은 뒤에도 납기 일주일 전, 3일 전, 이틀 전에 내지 않은 아이를 불러 꼭 내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하루 전이야 말할 것도 없다. 비상등이라도 켜진 듯 다음 날 반드시 가져오라고 말하고 또 말했다. 가정 형편상 도저히 기일까지 못 내게 된 아이에게 선생님이 자신의 돈을 빌려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한을 맞춰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기일 내 전원 납부 신화가 탄생했다. 지고는 못 산다고 한 선생님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전교에 이런 반 없어요. 뭐든 내라 하면 그날 꼭 갖다 내는 반으로 소문났어요.”
그게 그렇게 자부심을 가질 일이었을까? 더 중요한 게 있을 텐데.
선생님은 오랫동안 자신의 반 아이를 모르고 이름도 못 외웠다. 출석부를 보고 이름을 부를 뿐 실제 아이와 연결하지 못했다. 한 아이는 선생님이 명찰을 보려고 해서 팔을 올리는 척하며 가렸더니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운동장 조회 때 담임 선생님이 복장 검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교복에 흰 깃을 제대로 달았는지, 머리카락 길이는 규정을 지켰는지, 명찰을 잘 달고 있는지 선생님이 가까이 와서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손으로 머리도 쓸어내리고 교복의 매무새도 바로잡았다.
한 반은 2열 종대로 서 있었다. 그 날 선생님은 우리 쪽으로 오더니 우리 반 한 줄과 옆 반 한 줄을 검사했다. 우리 반 아이를 잘 몰라서였다. 옷깃을 매만지던 우리는 기가 막혔다. 입학하고도 몇 달이 지난 때였다. 복장 검사를 받다가 복장이 터졌다. 여태 자기 반 학생도 모르면서 돈만 일등으로 갖다 내게 하면 다냐고, 이 정도면 교사를 그만둬야 하지 않느냐고 교실로 들어가는 내내 우리는 흥분해서 말했다. 수업이야 수십 년 가르친 관성으로 할 수 있다 쳐도(잘 못 가르쳐도 문제 될 건 없다. 공부는 학생이 알아서 하는 거로 되어 있으니) 교사 업무는 잘 해내는지 의심스러웠다.
선생님이 정한 규칙 중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말을 못 하게 한 것이다. 공부 시간에 말하지 않기는 다년간의 학교 교육으로 매우 잘 알고 있고 이해도 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공부 시간뿐 아니라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막 등교한 아침은 물론 수업이 끝나 책가방을 싸며 집에 갈 준비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선생님이 불쑥 나타나 서 있는 아이를 보면 왜 돌아다니느냐고 나무랐다. 선생님들만 ‘쉬는 시간’이라 하지 아이들은 다 ‘노는 시간’이라 부르는 그 시간에 친구랑 얘기도 하고 돌아다니며 좀 놀면 어때서. 노는 시간에는 놀아야지.
“학교만 오면 입 꼭 다물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학교 가서 종일 입 꼭 다물고 있으려면 독학하지 뭐하러 학교까지 가는가. 아이들은 학교에 공부만 하러 가지 않는다. 친구와 놀려고도 간다. 어떻게 노는 시간조차 말 한마디 않고 가만히 앉아서 종일 공부만 한단 말인가. 우리가 공부하는 기계인가?
선생님은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ㅇㅇ는 (학교 갔다 와서) 책보 떨어지자마자 공부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선생님은 우리도 그런 학생이 되기를 바랐겠지만 그건 본인의 선택 아닌가. 우리는 달랐다. 우리는 어느 정도 공부하고 나서는 말도 하고 놀고 싶었다.
책가방을 싸느라 어수선한 종례 시간, 선생님은 어떤 애를 지적하며 ‘야야, 니 와 말하노?’라고 했다. 어떻게 저리 말할까 싶었다.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언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 분이 사람한테 왜 말하느냐니. 말을 하므로 사람인 것을.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라는 노래가 인기 있을 때였다. 우리는 가랑잎이 구르는 것만 봐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사춘기였다. 말도 하지 말고 웃지도 말라니 그런 고통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영어 본문을 통째로 외우라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학생들, 항상 뭔가를 생각해요.”
입 꼭 다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언어를 말하는 데는 쓰지 말고 생각하는 데만 쓰라니 우리를 철학자로 만드시려는 건가? 나는 말할 수 없는 아이의 괴로움에 대해 선생님이 생각해보셨으면 했다.
공부 시간에 어떤 단어의 뜻을 묻기에 반사적으로 영어 사전을 펼치자 선생님이 품사도 생각지 않고 사전부터 펴면 어쩌느냐고 야단친 일이 생각난다. 찾아 놓고 생각하면 안 되나? 선생님은 항상 공부했던 자신과 달리 학교 와서 떠들려고만 하고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우리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왜 영어를 전공했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다.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찌 저리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까, 서양 문학을 많이 접했을 분이 어쩜 저렇게 트이지 않고 유연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선생님은 한 번도 감동한 책이나 영화나 음악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선생님도 분명 영시는 읽었겠지만 선생님이 소설책을 보며 뒹구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학습 자료로만 읽었을 것 같다.
책보 떨어지자마자 공부했고 지고는 못 산다고 했으니 공부를 잘했을 텐데 그 시대에는 여자로서 갈 만한 학과가 많지 않았으리라. 영어 성적도 좋고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으며 교사가 여자의 직업으로 최상이라 여긴 때라 선택하게 되지 않았을까? 말없이 공부하는 것만 좋았다면 셰익스피어가 공부할 대상인 게 아무 문제 되지 않는 학자의 길이 더 맞았을 텐데.
선생님은 동료 선생님들과도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 영어 과목을 각기 다른 영어책으로 두 선생님이 가르쳤다. 운동장 조회할 때 다른 영어 선생님이 우리 반 애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더니 우리 선생님이 남의 반은 참견 말고 선생님 반이나 신경 쓰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다음 영어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이 3반, 하더니 그냥 웃었다. 내막을 아는 우리도 웃었다. 선생님들도 좀 봐주고 웃어넘겨야 하는 선생님이었다.
교생 실습 나온 사람들도 그걸 알고 선생님을 나이 든 할머니처럼 대했다. 우리 반에 배정된 세 교생 중 한 사람은 음악 전공자였다. ‘교내 합창 경연 대회’를 앞두고 있었으니 복 받은 반이었다. 그 선생님이 연습할 때 많이 봐주신 덕분인지 우리 반이 1등을 했다. 지정곡은 '울산 아가씨', 자유곡은 '저 파란 들판에서'를 불렀다. 실습 기간이 끝난 뒤라 교생은 없었고 우리 선생님이 아주 기뻐하셨다. 그 모습을 보니 우리도 좋았다. 교생 선생님들이 떠나기 전, 기념으로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 남아있다. 녹색 잔디 위에서 흰 블라우스를 입고 앉은 선생님이 환하게 웃고 있다. 선생님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어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날 공부 시간에 선생님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공부와 시간을 중히 여기는 분이 왜 수업하다 말고 그럴까 했다.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 조를 만한 선생님이 아니어서 그동안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어를 가르칠 때보다 더 집중해서 들었다. 선생님이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그 뒤로 선생님은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만은 선생님도 표정이 부드러웠다. 도중에 이야기를 끊지 못해 이러다 오늘 진도 못 나가겠다, 하여 같이 편하게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자꾸 1학년, 1학년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단다. 그 대목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존심이 셌는지 보라며 그걸 모른다고 하기가 싫어 옆의 아이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 우리가 몇 학년인지 알아?”
그렇게 자존심이 강했던 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 번은 옛날 이야기하던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리 오랜 세월 뒤에도 눈물을 뿜겠는가.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인해 꿈이 좌절되었을까? 선생님도 보통의 감정을 가진 사람인 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금은 선생님을 달리 보고 이해하려고 했다.
선생님은 먹는 일에 진심이었다. 교무실에서 도넛 같은 걸 몰래 드시다 우리에게 들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많아서 그러는데 좀 먹겠냐고 해서 사양한 적이 나도 있다. 그걸 보며 성장기에 충분히 못 드신 한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의 연보랏빛 체크 무늬 투피스가 생각난다. 통통하고 키가 작은 선생님께 치마가 길었던가. 치맛단을 두툼하게 접어 올린 표시가 났다. 직접 손으로 줄여서인지 치마 둘레가 자연스럽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우리는 그 옷을 ‘치맛단 이상한 옷’이라고 불렀다.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볼 때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종례 시간에 반장을 보고 놀란 얼굴로 ‘너, 얼굴에 뭐가 났어?’ 하더니 ‘비누 세수하지 마, 응?’이라고 하는 선생님을 보고 우리도 놀랐다. 질투가 아니었다. 저런 말을 할 줄 알다니, 해서였다. 선생님도 모성 비슷한 감정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왜 없겠는가. 30세 된 아들이 있다는데. 직전에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다는 한문 선생님께 들었다.
졸업 앨범에 한문 선생님은 있는데 우리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다. 1학년을 마치고는 어디서도 선생님을 뵌 적이 없다. 우리 학교가 맞지 않아 온 지 일 년 만에 다른 데로 옮긴 걸까?
선생님은 매우 특이했다.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했고 사회성도 부족했다. 그러나 학생을 자신의 틀에 맞춰 끌고 가려 한 점에서는 여느 선생님 못지않게 평범했다. 선생님께 좋은 점도 있었나 곰곰 생각해보니 누구든 편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반 아이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편애나 할 수 있으랴마는 장점인 건 맞다. 선생님을 두고 함께 탄식했을지언정 누구도 그런 일로 마음 상해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최고의 악정은 일제 치하도 아닌데 우리 말을 못 하게 한 일이다. 쉬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가 24시간 뛰어야 하는 심장도 아닌데 왜 입을 막고 그렇게 쉼 없이 돌리려고 했는지. 부지런한 선생님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