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를 처음 접한 게 언제였을까.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래를 김소월의 시인 줄도 모르고 불렀듯이 시조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활 속에 스며있었던 것 같다. ‘태산이 높다 하되...’ 정도는 잘 알았고 다른 시조도 몇 개 알고 있었다. 나는 시조가 재미있었다. 교과서에서 정식으로 배운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5학년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외울 줄 아는 시조 있는 사람?’ 하고 물었다. 그때 내가 손을 든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다. 나는 눈에 띄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였다. 내 몸에 시선이 집중되는 건 고통이었다. 나의 사전에 발표란 없었다. 선생님이 시키면 하지만 절대로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아는 시조가 있다고 손을 들다니. 지명하면 그 시조를 아이들 앞에서 외워야 할 텐데 어쩌려고?
선생님이 손을 든 나를 의외라는 듯이 보고는 이름을 불렀다. 일어나니 외워 보라고 했다. 무얼 외울지 정하지 않고 손부터 들어서 그때부터 뭘 외울지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시조들이 서로 나가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누구나 아는 쉬운 시조는 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라는 김종서의 시조를 엄숙하게(실은 굳어서) 외웠다. 이어서 알 사람은 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라고 이순신 장군이 고뇌하는 시조를 읊었다. 그다음, 느닷없이 내 입에서 이런 시가 떨어졌다.
‘백두산석 마도진,이요
두만강수 음마무,라
남아이십 미평국,이면
후세수칭 대장부,리오’
남이 장군의 한시다. 시조를 외우라는데 웬 한시인지. 나, 잠시 정신이 나갔던가? 이런 것도 알아, 라는 허세였을까?
마무리로 다들 알고 있을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를 외웠다. 나오고 싶어 하는 시조는 더 있었지만 혼자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그 정도만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시조 한 편 정도를 기대했을 텐데 어쩌자고 내리 네 수나 외웠는지. 그때라도 정신을 차려 다행이었다. 신 내린 듯 한 시간 동안 리사이틀 했으면 어쩔 뻔했나.
‘백두산 바위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많은 물은 말을 먹여 다 말리리.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컫겠는가.’
‘북정가’라 불리는 이 시는 장부의 호쾌한 기상을 드러냈다고 호평받았으나 이 시 때문에 남이는 죽었다. 겨우 27세였다.
조선 태종의 외 증손으로 태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은 뛰어난 무관이었던 남이 장군은 26세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를 시기한 유자광이 저 시에서 한 글자를 고쳐 모함했다고 한다. 세 번째 행의 ‘평평할 평‘자를 ’얻을 득‘자로 바꿔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이라 했으니 역심을 품은 게 아니냐고 한 것이다.
만화로 된 위인전에서 젊은 장군의 높은 기개를 노래한 이 한시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여러 번 읽다 보니 몇 글자 되지 않는 한시가 저절로 외워졌다. 그런데 ’남아이십 미평국‘을 ’남아이십 미득국‘으로 바꿔 남이를 역적으로 모니 몹시 속상했다. 글자 하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니 정말 놀랍고 안타까웠다. 시가 마음에 들어 자꾸 외우다 보니 시조처럼 여겨졌던가? 그래도 시조를 외울 자리에서 꽂혀있던 한시를 읊어댄 나,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5학년 때 선생님은 4, 50대쯤의 남자였다.(어릴 때는 어른의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 아이에게는 스무 살이나 쉰 살이나 똑같이 나이 먹은 어른이다) 무서워 보이는 첫인상에 겁을 먹었는데 실력 있고 공평한 선생님이었다. 가르치는 데 열의가 있어 설명하는데 딴짓하는 애가 있으면 크게 화를 냈다. 열심히 가르치시는 만큼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랐다. 매월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순으로 앉히고 과목별 석차도 내어서 불러주었다. 그게 즐겁지는 않았지만 동기 부여가 되기는 했다. 처음으로 공부라는 걸 해보았다.
선생님은 소극적인 나를 방치하지 않았다. 조용히 지지했다. 내가 뭔가를 잘했을 때 진심으로 기쁘고 대견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말 없는 칭찬과 인정에 가슴이 벅찼다.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다. 초등학교 전 학년을 통틀어 5학년 때 상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중 일기를 매일 써서 받은 상과 ’충무공 탄신 기념 글짓기 대회’에서 받은 상이 기억난다.
다 쓴 일기장을 앞에 붙이라고 해서 검사받을 때면 몇 권이 묶인 일기장을 냈다. 일기를 쓸 때도 불편하고 가방에 넣어 다니기도 무거웠다. 그래도 그걸 보면 나의 역사가 이렇게 쌓였구나, 하는 마음에 뿌듯했다.
상 받은 이후로 각인된 충무공 탄신일은 4월 28일이다. 별 걸 다 기억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요즘도 충무공 탄신 몇 주년 기념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면 날짜를 확인하며 5학년 때를 떠올리곤 한다.
상도 많이 받았지만 5학년은 잊지 못할 치욕을 겪은 해이기도 하다.
빵점을 맞아본 적이 있는가? 시험에서 백 점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빵점을 받아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산수 시간에 기약분수를 배웠다. 선생님이 설명할 때 내 정신이 어디 멀리 다른 곳을 헤맸는지 중요한 대목을 놓쳤다. 기약분수가 뭔지 알지 못한 채 수업이 끝났다. 그날 바로인지 그다음 날에 시험을 보았다. 전부 ’다음을 기약분수로 고치시오’라는 문제였다. 알다시피 기약분수는 분자와 분모의 공약수가 1뿐이어서 더는 약분되지 않는 분수를 말한다. 그러니까 3/6이면 1/2, 4/12면 1/3처럼 큰 숫자를 약분하면 된다. ‘약분’이라는 핵심은 놓치고 내 정신에 남은 단 한 가지는 기약분수가 간단한 수라는 것이었다. 그 생각으로 문제의 분수를 모두 약분도 하지 않고 1/2이니 1/3이니 하며 간단하게만 썼다. 기약분수의 꼴이 그렇다고 아무 분수나 내키는 대로 쓴 것이다.
20문제쯤 되었을까. 운 없게도 내가 쓴 아무 분수가 정답과 일치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옆의 짝이랑 시험지를 바꿔 채점한 결과, 나는 0점이었다. 점수를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0점! 나는 절대 받을 일 없을 줄 알았던 점수, 0점을 받다니. 점수를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보다 공부 못한 짝의 시험지에도 0이 적히지는 않았다. 이해하지 못했으면 한 문제든 스무 문제든 0점을 받는 게 당연한데 와들와들 몸이 떨렸다. 눈물이 쏟아지려고도 했다.
백 점 받은 사람도 일어나게 해서 칭찬했을 텐데 0점 받은 사람을 일어나게 한 것만 생각난다. 0점 받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다니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혼자는 아니었다. 처음 배워 나처럼 이해하지 못한 애가 많았던지 열 명은 넘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덜 부끄러웠던 건 아니다. 대충 보니 평소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잘하는 애는 없었다. 그들과 같은 무리로 서 있다는 것이 더 창피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애들도 나만큼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 어떻게 한 문제도 못 맞혔는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부스스 일어났을 때 선생님이 ‘네가?’ 하듯 눈을 크게 떴다.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한참 동안 나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독하게 실망한 듯도 하고 몹시 딱해하는 것 같기도 하던 그 얼굴, 그 눈빛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그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가운데서도 죄송했다. 또 그만큼 나를 믿어 준 것 같아 고마웠다.
어깨가 축 처져서 집에 왔을 때 막 대학에 입학한 오빠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던가? 나는 빵점 받은 사실을 말했다. 시험지를 보여주니 오빠는 ‘아이구야, 우리 집안에 빵점 맞는 사람이 다 있구나.’ 했다. 그리고는 기약분수가 뭔지 설명해주었다. 허무하리만큼 별 게 아니었는데 빵점을 맞아 가문의 영광 아닌 수치의 역사를 썼다. 내 역사책인 일기장에도 사관으로서 정직하게 기록해 뒀을까?
5학년 때 다룬 주판도 나에게 괴로움을 안긴 물건이었다. 나는 주판 놓는 법을 선생님께 배운 기억이 없다. 주산은 특별한 아이들이나 하는 거로 생각했다. 중학교 때 주산 잘 놓는 아이는 시험 보고 나면 항상 남아서 선생님을 도와 드리곤 했다. 과목별, 반별로 시험 점수를 합산하고 평균을 낼 때 주산으로 하면 빠르고 정확한 모양이었다.
주산을 배운 기억은 없는데 산수 시간 중 주산 하는 시간에는 주판을 놓아야 했다. 다른 애들은 언제 배웠을까? 선생님이 ‘떨고 놓기를!’ 하고 숫자를 부르면 따글 따글 주판알 움직이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놓을 줄 몰라서 손가락으로 주판알을 움직이는 체하며 암산을 했다. 선생님이 마지막 숫자를 말하고 ‘...이면?’ 하고 물으면 다 놓은 사람이 손을 들고 답을 말했다. 맞으면 다 같이 ‘정산이오.’ 하고 틀리면 ‘오산이오.’라고 했다. 내 암산은 주산만큼 정확하지 않을 것 같아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쳐도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께 물어볼 용기도 없으니 주산 놓는 시간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오빠가 해결해 주었다.
어떤 오후, 오빠에게 주산을 어떻게 놓는지 모른다고 했더니 ‘모를 게 뭐 있어? 숫자만큼 주판알을 이렇게 올리면 되지.’하고 가르쳐 주었다. 배워보니 공포심을 가질 만큼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날 집에서 주산 문제집을 펴놓고 연습해보니 재미있기까지 했다.
오빠는 무슨 일이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큰일 났다 싶은 일에도 이러 이러면 되잖아, 라고 세상 쉬운 일인 것처럼 말한다. 오빠의 말을 듣고 있으면 무겁게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그다음 주산 시간부터 암산이 아닌 주산을 했다. 빠르게 잘하지는 못해도 주판을 놓을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 마음이 편안했다. 오빠 덕분이다. 오빠는 뒤에 충무공 탄신일에 결혼했다.
6학년으로 올라갈 때 선생님도 같이 올라오셔서 옆 반 담임이 되었다. 남이 장군은 한 글자 때문에 죽고 나는 한 등수 때문에 선생님 반이 되지 못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서 데리고 가는, 또 선생님 반이 되는 아이들이 부러워 한참 고개를 빼고 돌아보았다. 엄마 떨어지는 아이처럼.
선생님은 장수하지 못한 것 같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도 아주 오래전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마음속에 나를 인정하고 듬뿍 격려해 준 고마운 분으로 길이 장수하고 계신다.
중국의 태산은 1,500m 남짓하다고 한다. 어지간하면 못 오를 리 없는 산이다. 그러나 각자의 목표인 태산은 오르고 또 올라도 못 오를지 모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뒤에 ‘하늘 아래 뫼이로되 발아래 뫼는 아니로다’라는 탄식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첫 발짝도 아니 오르랴.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른 만큼 높이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