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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중대장님

by 가을산

금요일마다 교련복 차림으로 학교에 갔다. 얼룩무늬 교련복에, 앞 목에는 하얀 가리개를 하고 교표가 새겨진 모자를 썼다. 국기 강하식을 위해서였다. 관공서에서는 하절기엔 저녁 여섯 시, 동절기에는 다섯 시에 국기 강하식을 했다. 이 시간, 거리에서 애국가가 울리면 길을 가다가도 멈추고 국기가 있는 쪽을 향해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이를 어기면 처벌도 받았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진지한 얼굴로 깃대 꼭대기에 매달린 태극기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짧은 시간을 위해 교련복을 입고 등교하나 싶었는데 치마로 된 교복을 입다가 바지인 교련복을 입으니 버스를 타고 내리기도, 학교에서 활동하기도 편해서 좋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여고생이 된 줄 알았더니 우리는 학도호국단이라고 했다. ‘배우면서 지~킨다 학도호국~단’이라는 ‘학도호국단가’도 배웠다. 소풍은 행군이라 불렀다. ‘춘계 행군’, ‘추계 행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교련복을 입고 갔다.


교련 시간에는 부상자에게 하는 응급처치법을 배웠다. 붕대나 삼각건으로 다친 곳을 감싸고 묶는 방법은 부위가 머리인지 가슴인지 엉덩이인지에 따라 달랐다. 하나하나 익혀 제대로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실기 시험을 앞두면 짝끼리 서로 실습 대상이 되어 기꺼이 머리나 팔을 대주었다. 가끔 흰 붕대로 머리를 온통 감싼 아이들로 가득한 교실을 보면 오싹,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제식 훈련도 했다. ‘열병’, ‘분열’, ‘받들어 총’, ‘우로 봐’, 이런 단어들을 배웠다. 사열도 받았다. 사열 날짜가 정해지면 한 달 전부터 수업 시간을 단축하고 매일 운동장에 나가 열병과 분열 연습을 했다. 오후의 땡볕에서 살갗은 ‘탈대로 다 타시오’였다.


사열식에서 줄 서는 법은 그전까지 해온 방식과 반대였다. 제일 큰 사람이 맨 앞에 서고 제일 작은 사람은 맨 뒤에 섰다. 키가 크지 않아 앞쪽에 서 있던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뒤로, 뒤로 밀려났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이유인즉 맨 앞에 있는 사람은 단체의 얼굴로 키가 커야 늠름하고 멋져 보이기 때문이란다. 병사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도 우람한 체격의 사람을 앞에 세운다는 말을 들었다.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게 외모인가?


나폴레옹도 키가 작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병사에게 위엄을 보이지 못하거나 통솔력이 없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삼국지’에서 인의의 화신으로 불리는 유비도 뛰어난 인재인 봉추의 볼품없는 외모를 보고 마지못해 받아서는 한직으로 발령 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문제는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에게 있다.


뒤에 서 있으니 몹시 이상했다. 교실에서 앞쪽에만 앉다가 마음대로 앉게 하여 뒤에 앉아본 적이 있다. 정돈된 앞쪽을 보고 선생님의 눈만 쳐다보다가 앞의 아이들이 움직이거나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거나 짝과 얘기하고 웃는 게 다 보이니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교실보다 몇십 배 넓은 운동장 뒤에 서니 산만함도 몇십 배 더했다. 시선이 전후좌우로 마구 흩어졌다. 운동장 뒤쪽 끝에서 볼 때 앞이란 까마득히 먼 곳이었다. 기수단 어쩌고 하는데 뒤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임석관은 누구이며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개 빼지 말고 똑바로 서서 앞만 보라고 해서 그랬더니 앞사람 뒤통수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키 큰 아이들이 시야를 가로막아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채 지시를 따르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 일인지 알았다.


한편, 뒤에 있다는 게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도 알았다. 높은 강단에 올라선 교련 선생님은 손을 들어 ‘저기 후미, 움직이지 말고 똑바로 서!’라는 말을 자주 했다. 뒤에 서 있는, 키 크지 않은 우리는 후미, 맨 뒤에 있는 꼬리였다. 머리를 곧추세워도 꼬리가 요동치는 건 막을 수 없다. 아무리 후미, 후미, 불려도 꼬리 쪽에 있는 아이들은 살랑살랑 꼬리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틈만 나면 장난치고 시시덕거렸다. 반의 경계를 넘어 한 중대원이 된 우리, 전우애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가? 드물게 담임 선생님이 우리 앞에 올 때만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이 내쉰 숨까지 들이마셨을 앞자리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유를 깊이 들이마셨다.


전교생은 한 연대, 한 학년은 한 대대, 한 반은 한 소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몇 소대가 묶여 한 중대가 되었다. 우리 반이 속한 2중대의 중대장은 예쁘다기보다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얼굴 윤곽이 뚜렷했다.

중대장은 진짜 군인처럼 말수가 적고 침착했다. 구령을 내릴 때의 얼굴은 조각처럼 단단하고 눈빛은 냉정하여 주변의 공기조차 냉각된 듯했다. 대대장보다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에 무심한 표정, 흔들리지 않는 눈빛의 그 아이를 우리는 흠모했다.

맨 앞에 서서 ‘열중쉬어’ 자세로 전방을 주시하던 그 애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뒤에서 아이들은 비스듬히 옆으로 보이는 그 애의 얼굴이 비너스상의 옆얼굴과 똑같다고 했다. 내 주위에 있는 아이들 모두 중대장에게 매료되었다. ‘잘생긴 중대장, 반했어요.’ 한 그 애들은 시시때때로 ‘와, 멋있다!’, ‘어머, 이쪽을 봤어.’, ‘아, 웃었어.’ 같은 말을 했다.


열병이 끝나고 분열하라는 명을 받은 연대장이 돌아서서 ‘분열!’ 하면 대대장이 받아서 ‘분열!’하고 중대장이 차례대로 ‘분열!’, ‘분열!’ 했다. 뒤에 있는 우리 귀에는 분열, 이란 말만 여러 번 들렸다.

분열로 우리 중대가 행진하여 조회대 앞을 지날 때 중대장이 ‘우로~봐!’ 하고 외치면 뒤에 있는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도 ‘오, 멋져!’ 했다. 중대 행렬이 조회대를 다 지나 중대장이 ‘바로!’를 외치면 아이들은 고개를 바로 하며 또 ‘아, 너무 멋있어.’ 했다. 엄숙히 행진해야 할 때도 입을 가만두지 않고 계속 조잘거렸다. 교련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후미, 열 똑바로!’, 했지만 우리 사랑은 막지 못했다.


남녀 공학도 아니라 만화 주인공을 짝사랑 대상으로 삼아야 할 열악한 환경에서 멋있는 아이가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자 우리는 마음껏 사랑을 주었다.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열광했다. 사열 연습하러 나갈 때마다 중대장을 향한 사랑이 깊어갔다. 만인의 연인이라 질투는 없었다. 중대장 덕분에 사열 연습 시간이 즐거웠다. 우리가 자신을 그렇게나 좋아한 줄 그 아이는 알았을까?

사열식에서 ‘받들어 총!’을 할 때가 두 번 있다. 국기에 대해서와 임석관에 대해서다. ‘임석관에 대하여, 받들어 총!’할 때는 다 같이 ‘충성!’ 하지만, ‘국기에 대하여, 받들어 총!’ 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구령의 뒷부분이 똑같아서인지 연대장이 ‘국기에 대하여, 받들어 총!’ 했을 때 큰 소리로 ‘충’, 하다가 제풀에 놀라 ‘성’을 입속으로 삼키는 일이 흔히 일어났다.

선생님이 국기에 대해 경례할 때는 ‘충성’ 하지 않는다는 말을 골백번도 더 했지만 ‘받들어 총!’ 이란 말 다음에는 반사적으로 ‘충성’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로 화답해야 할 것 같은 무의식의 작용이었을까? 그래도 한 번만 신경 쓰면 될 텐데 왜 매번 ‘충...’ 소리가 나게 하는지 안타까웠다. 앞에 있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선생님과 가까워 정신을 차려서인지 ‘충...’ 소리는 선생님과 멀리 떨어진 곳이나 뒤쪽에서 잘 났다. 연습할 때는 그럴 때 웃음이 나지만 실제 사열에서마저 ‘충...’ 소리가 나오면 우리도 민망했다.


왜 국기에 대해서는 ‘충성’이라 하지 않는지 선생님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스스로 알아보니 깃발을 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고 한다. 뒤에 있어 보이지도 않은 기수단이 그때 깃발을 높이 들었다가 90도로 기울였을 테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거수경례만 하며 조용히 있어야 한다. 대표로 경례한다고 진작에 좀 알려주지. 그래도 충, 소리가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릴 때부터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라는 구호를 듣고 자랐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에 ‘충성’이라 외치는 건 무척 자연스러웠다. 오랜 시간 뒤에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자가 나타나 나라를 뒤집어 놓을 줄 몰랐다. 말과 달리 그는 자기 사람에게만 충성한 것 같다. 당시 우리는 사람에게만 ‘충성’하라는 요구가 힘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임석관’이라는 말은 낯설었다. 자꾸 바뀌는 사람보다는 영속할 국가를 나타내는 국기에 대하여 더 ‘충성!’이라 외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음악 선생님은 군가 부르는 법을 가르쳤다. 앞에서 ‘군가 하며 행진한다! 손 흔들며 군가 한다! 군가는 진짜 사나이! 하낫 둘 셋 넷!’ 하면 우리는 위에서 사선으로 주먹을 내리며 박자를 맞춰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라고 불렀다. 모습과 행동은 정체성을 만든다. 요즘의 군복과 똑같은 무늬의 교련복을 입고 군가를 힘있게 부르니 군인이 된 것 같았다. 군인처럼 팔도 더 씩씩하게 흔들어졌다. 군가도 감상적인 노래가 아니라 힘이 들어간 스타카토로 불렸다.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할 때는 내가 전선에 가 있고 지켜야 할 부모 형제가 있는 병사 같은 느낌이 들어 뭉클했다. ‘학도호국단가’를 부를 때는 학도병이 된 것 같더니. 군가를 부르는 이유나 군악대의 존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랜 군부 독재 시대가 끝나 2학년 때는 사열이 없었다. 그러나 또 다른 군부 독재가 시작되어 다시 교련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이게 될 줄이야! 사열식을 해본 경험이 3학년밖에 없다며 교련 선생님은 우리를 믿었지만 해봤다고 더 잘하지는 않는다. ‘국기에 대하여 받들어 총!’할 때 나는 ‘충...’ 소리는 여전했다. 임석관을 모신 사열 때도 났다.


3학년 때 교련 선생님은 아주 예뻤다. 갸름한 얼굴이 달처럼 고와 군복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엄격한 말투로 명령을 내리고 경례를 받았다. 우리도 그렇게 어울렸던 것 같지는 않다. 신념에 따라 군대에 안 가겠다고 하여 실형을 산 사람도 있지만 그때 우리는 ‘의식화’되어 있지 않았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더라도 공부하지 않고 하는 사열 연습을 운동회 같은 놀이로 여겼다. 매월 15일에 했던 ‘민방위 훈련’이 싫어하는 과목 시간에 걸리면 좋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겨울, 잊고 있던 단어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어린 학생들이 어울리지 않게 또 군복을 입고 사열 연습을 할 뻔했다. 그렇게 되지 않아 다행이다. 사열은 군인에게 제일 어울린다. 멋진 중대장은 내 추억 속에 있으면 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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