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어머니

-7강, 도입부 다시 쓰기

by 가을산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 백 세가 가까워도 돌아가실 계획이 없던 시어머님이 그런 분이다.

어머니는 말투가 독특했다. 고향은 제부도 밑 바닷가인데 같이 자란 이모나 외삼촌들과도 달랐다. 고향 말에 큰 며느리 고향인 논산과 호남 사투리도 섞인 듯한데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본 터라 매우 특이해 보였다. 아이들이 자랄 때 한 주에 절반은 우리 집에 계셨던 어머니의 말투를 아이들은 재미있어했다. 할머니가 쓰는 뭐하는 거여, 그게 뭐여, 자는 거여, 어디로 가는 거여, 같은 말을 따라 하고 나 할 거여, 갈 거여, 먹을 거여, 하며 웃었다.


아녀, 몰러, 우뎅이(위), 는 딸이 지금도 매일 쓰는 말이다. 비쩍 마른 딸아이를 두고 어머니가 ‘그래도 뚱뚱한 것보담은 나아’ 하신 데서 나온 ‘~보담은’과 이게 저것보다 ‘훨썩’ 낫다는 말은 아들이 잘 쓰는 말이다. 할머니 말투로 하면 말하기가 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말의 어미가 다르거나 들어보지 못한 말만 한 게 아니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비유와 속담도 많이 쓰셨다. 온 식구가 함께 외출하려고 할 때 나갈 채비가 한없이 이어지면 일찌감치 준비하고 소파에 정자세로 앉아 기다리던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신줏단지 개가 다 물어간다.' 어머니를 따라 나도 곧잘 이 속담을 아이들에게 쓰곤 한다.

'속을 닦아야 사람이 되는 거여' 하며 면학과 사람됨을, '돌부리 차면 발부리 아픈 법이여' 하며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기도 했다. 제 생각만 하는 자식 얘기를 듣고는 ‘내 발등에 불 꺼야 애비 발등에 불 끈단다’ 하고 말씀하셨다. 아이들은 할머니 말을 인용해 '지는 게 이기는 거여', 하며 서로 양보하라고 우기기도 했다.

오늘도 어떤 일에 대해 갑론을박하다 얘기가 길어지자 아들은 ‘할머니가 그러셨어. 가려운 데 다 긁다가는 제사 못 지낸다고.’ 하며 일어나 행동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흔히 ‘할머니 전용 단어’가 튀어나와 웃게 된다. 웃으려고 일부러 어머니(할머니)가 하던 말이나 말투를 쓰기도 한다. ‘그보담은 이게 낫지’, ‘그렇게 하니 훨썩 낫구먼’, 하고 나는 괜히 ‘물김치에 말국(국물)이 별로 없네’, ‘풀 방구리 쥐 드나들듯 왜 이렇게 들락거리냐’, 했다.


어머니는 100을 채우지 못하고 99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돌아가신 건 아니다. 매일 나와 아이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신다. 어머니의 일곱 자식과 며느리, 사위들과 열다섯 명의 손주와 열여덟 명의 증손주들 가운데 나와 우리 아이들만큼 자주 어머니를 소환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댁 식구들이 모일 때야 자연스럽게 어머니 얘기가 나오지만 어쩌다 혼자 생각하는 자손은 있을지언정 우리 식구처럼 날마다 일삼아 어머니 말투를 쓰며 어머니를 불러내는 사람은 없으리라.


우리 식구 중 정작 어머니의 아들인 남편은 이런 대화에 끼어들 새가 없고 있더라도 별 감흥이 없는지 나와 아이들만큼 재미있어하지도 않는다. 어떤 말은 어머니가 잘 쓰시던 말인지도 몰라 나와 아이들만 어머니 특유의 말투를 마르고 닳도록 쓰고 또 쓴다.


말하기를 좋아한 어머니는 확고한 주관이 있는 분이었다. 본인과 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많아 늘 당당하셨다. 경위 바르고 강직한 성품이라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독특한 말들은 재미있었지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는 식의 말도 많이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이제 아이들과 ‘할머니 체’로 말하면 항상 웃게 된다. 어머니가 거의 날마다, 때마다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


몇 해 전 아주 인기 있었던 한 영화에서 ‘납득이 안 가, 납득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던 남자 배우는 ‘납득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크게 유명해졌다. 신청곡을 들려주는 찻집이 있었을 때, 누군가가 항상 같은 노래를 신청하라는 걸 연애 비법으로 알려준 적이 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그 노래가 들리기만 하면 나를 떠올리게 될 거라고. 그럴 것 같다. 어머니가 잘 쓰던 말을 하면 어머니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 오랜 암 투병 끝에 돌아가신 손위 시누이가 계시는 추모 공원에 갔을 때다. 여러 분들을 지나 걸어가자면 가로 눕혀진 묘석에 쓰인 글도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한없이 사랑합니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묘석에 쓰인 글이 다 비슷했다. 모두 진심이고 몹시 고심해서 새긴 글이겠지만 좀 다르게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같이 간 아이들에게 생전에 자주 하던 말을 쓰면 어떨까 했더니 바로 아들이 엄마는 ‘양치질했니’로 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게 엄마다운 말이고 그래야 엄마한테 온 거 같을 거라고. 딸은 ‘방 정리했니? 빨리 자라.’는 말도 써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쓸 말을 하나씩 찾아낼 때마다 킥킥거리며 재미있어했다. ‘빨리 들어와’도 써야지, 하며 꽃다발이 스산한 수백 개의 묘지 가운데서 나도 웃었지만, 쟤들도 저희 엄마가 반드시 저희를 떠나갈 걸 아는구나, 나도 그럴 걸 아는구나, 하는 마음에 서글프기도 했다.

이왕이면 좋은 말로 나를 기억해주면 좋겠는데 나는 평생 아이들이 내놓는 저런 말밖에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처럼 지혜가 담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라도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지만 늦었다. 처음부터 다시 살지 않고는 불가능하리라.

훗날 아이들은 무심결에 ‘할머니 체’로 말하다가 같이 그 말투로 이야기하던 엄마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내가 하던 말도 떠올리게 될까? 양치질했니, 얼른 자라, 같은 말이라도. 날마다 하던 그 하찮은 말이 사랑의 말이었음을 그때쯤에는 알게 될까? 할머니 말로 이야기할 때도 저희와 그렇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좋아했다는 걸 알까? 나도 어머니처럼 종종 아이들이 불러내어 죽지 않는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절대 풀릴 수 없는 궁금증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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