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진의 <제부도>를 읽고
홍해처럼 바다가 열려 길이 되는 제부도는 한때 여름마다 온 형제자매가 근처 바닷가로 휴가 갔기에 익숙한 지명이다. 썰물로 물이 다 빠져나간 저녁 무렵 드넓은 모래벌판을 맨발로 걷는 일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바닷물 속에 있는 것보다 좋았다. 아이들과 소라게가 기어 다니는 모습을 한가로이 지켜보기도 했다.
우리 식구끼리 제부도에 갔을 때는 길이 열려있는 동안 잠시 들어갔다 나와서 그곳이 어느 때는 바다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천국 문이 닫히는 듯한 아슬아슬한 경험을 해보지 않아 어디에나 있는 땅으로 보일 뿐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소설 속 제부도는 죽음의 혓바닥이 파도처럼 널름대는 곳이었다. 파도가 왔다 가듯 삶과 죽음이 갈리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제부도를 수없이 건너갔을 테다. 소설 속 주인공은 두 번 갔다. 한 번은 희망으로 달떴지만 절망하고 돌아왔고 한 번은 죽기를 작정하고 갔다.
주인공 여자는 자신을 싸리꽃처럼 여겼다. 싸리꽃은 ‘있는가 싶지도 않게, 피었다고 하기도 쑥스러운 모습으로 푸슬푸슬 눈이 내린 자국처럼 희끗하다가 어느 날 눈이 녹을 때처럼 맥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명색이 ‘꽃’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식물을 어쩌면 이다지도 지독하게 표현했을까?
여자는 첩의 자식이라고 동네 여자들이 흘겨보며 입방아를 찧고 아이들마저 수군대며 그녀를 따돌리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여자는 피어 있다고 할 수도 없어 누구도 핀 줄을 모르는 싸리꽃처럼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 두지 않기를 소원했다. 무심한 남자에게 끌린 것도 그래서였다. 과묵한 정도가 아니라 전혀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 남자를 좋아했다는 건 과거를 생각해도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과묵한 남자의 매력에 끌린 여자들이 결혼하고는 남편을 답답하게 여기듯 여자도 남자가 계속 무심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여느 여자처럼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하고 다정한 태도를 보이기를, 자신과 결혼해 주기를 바랐다.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도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 자신과 결혼해 주기를 바랐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싸리꽃 같은 자신을 꽃으로 봐주고 그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무심한 사람이라 끌렸어도 나에게 무심한 남자를 끝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 그 여자를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잖아, 라며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 무엇이 어쩔 수 없다는 건지.
그 남자는 자신이 그렇게 할 때 그 여자가 얼마나 상처를 입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의 마음이 어떨지 가늠해 보려고도 않는다. 이건 무심한 게 아니라 공감 능력이나 측은지심, 도덕성도 없는 것이다.
결혼하고도 주인공 여자를 찾아오는 남자는 아내가 꼭 닮은 사내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아내가 아이를 못 낳아 입양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여자는 왜 그런 남자를 떠나지 못할까? 남자를 사랑할뿐더러 자신은 엄마처럼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손가락질받고 따돌림당하던 곳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어 봄마다 열병을 앓았던 소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려 역사 뒤에 숨었던 열일곱 살, 그 길로 말 한마디 없이 혼자인 어머니를 떠나 소식을 끊었던 여자였다.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삶으로 자신이 도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여자는 깨닫지 못했을까? 아버지를 기다리기만 했던 어머니처럼 여자는 남자에게 매달렸다.
남자가 자신을 떠나면 자신도 남자를 떠나면 그만이지 왜 자신을 떠나고 말았을까?
남자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 병이 아닐까? 유년 시절부터 겪은 결핍과 소외로 자신을 흔하디흔한 싸리꽃으로 여길 만큼 낮고 작아져 자신에게 무심한 남자를 좋아하다 기대한 대로 되지 않자 싸리꽃답게 맥없이 지려는 병.
이 소설은 정확히 30년 전 소설이다. 그때와 지금은 천지개벽이라 할 만큼 결혼이나 연애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요즘 젊은이가 소설 속 상황에 있다면 주인공 같은 행동을 하는 대신 남자에게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신경정신과에 가볼 테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나 문장은 강력했다. 모든 장면이 그림을 보듯 선명했다. 바닷물이 양쪽에서 들어올 때는 금방이라도 범람하여 사람이 물에 잠길까 봐 조마조마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남자와 여자가 타고 뭍으로 빠져나가려는 차 주위로 바닷물이 들어올 때 남자가 시키는 대로 여자가 차에서 내려 남자를 인도하는 대목이었다.
남자가 바닷물 속에서 후진하는 차를 여자는 돌아서서 보이지 않는 끈으로 끌고 간다고 상상하며 물 밖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허리가 휘는 무게로 남자가 실려 올지라도 결코 남자를 놓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는 여자.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한 묘사에 마치 내가 그 여자가 되어 차를 끄는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오감에 호소하는 실감 나는 묘사와 세심하고 철저한 문장이 이 소설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여자의 심리 묘사는 상세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것 말고는 알려주는 게 거의 없다. 키가 큰지 작은지, 말랐는지 실한 체형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빈 채로 발견된 차 안에 떨어져 있는 안경으로 안경 쓴 사람이었다는 것, 얼마 되지 않는 대사로 여자에게 자상하지 않고 좀 짜증스러워했다는 정도만 안다. 여자의 외모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제부도에 간 날 구두를 신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주제와 상관없다 여겨 그랬는지 모르나 인물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건 아쉬운 점이다.
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제부도’를 제목으로 삼은 건 남자와 여자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물처럼 헤어질지, 하나로 합할지 추측하게 하려는 뜻이었을까?
나는 여러 번 나오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결국 그들을 삼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런 소설이 흔히 그러듯 작가가 그녀 어머니의 삶과 그녀의 삶을 판박이로 만들 것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물에 빠져 죽은 걸 알고는 기어이 그녀도 남자를 잃어버린 제부도로 가서 일부러 길이 닫힐 때 물속으로 들어가겠구나 싶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일 테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싫어하면서 닮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여자가 심리학자들이 좋아할 만한 전형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독자는 전형적인 주인공을 좋아하여 예측대로 되는 걸 좋아한다고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다. 부모의 삶을 복사하는 사람이 많고 많더라도 작가가 다른 결말을 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나뉘었던 물이 합해지듯 남자가 결단을 내려 두 남녀가 다시 인연을 이어가고 헤어졌던 어머니도 만나 상처를 봉합하면 좋았을 텐데, 혼자 생각했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소설은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 부모 인생을 그대로 밟아가 불행까지 고스란히 답습하는 이야기는 인제 그만 듣고 싶다. 부디 삼십 년 전에 끝났기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는 한 걸음이라도 더 희망 쪽으로 내디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