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자매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에밀리도 없고, 친치아도 없고, 쿡, 마티아스, 라슬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지가 않다. 다들 나처럼 잘 걷고 있을 것이다. 바다를 보며 걷는 순례길에 신이 난다. 어쭈, 나 이제 제법 단단한 순례자가 된 것 같은데? 확실히 포르투갈길 중간 지점인 포르투 이후부터는 순례자들이 많다. 포르투를 순례길 시작점으로 걷는 사람이 꽤 많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에밀리와 헤어지고 여러 순례자 친구들을 새로 만났다. 아래 4가지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 순례길 위에서 가장 많이 나누는 질문 TOP4로 보아도 무방하다.
1.이름이 뭐야?
2.어느 나라에서 왔어?
3.순례길은 어디서부터 출발했어?
4.왜 길을 걸어?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났다. 국적의 다양성만큼 순례길에 온 이유도 다양했다. 새로 찾아온 인연 중 기억에 남는 순례자 친구들이 있다. 첫번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19살 제이미, 20살 케이트 자매. 자매끼리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어서 포르투부터 시작하는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벤 친구들이었다. 평소 온가족이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그런 가족 문화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힌 것은 아닐까 싶다.
둘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재밌는지, 한국 남자 배우들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목에 핏대를 세워 이야기했다. K-콘텐츠 덕분에 배우도 아닌 내가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마법. 14일 여정을 계획한 뒤 모든 숙소를 미리 예약했다고 했다.
"세실, 오늘 알베르게 예약했어?"
"아니, 나는 알베르게 예약 안 했는데.."
"그럼 어떡하려고?"
"그냥 마을에 도착하면 열려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가보려고!"
"포르투부터는 순례자가 많아서 괜찮은 곳은 예약이 다 찼어! 우리가 좋은 알베르게를 알아. 잠시만, 보자... 오, 한 자리 남아있다. 너만 괜찮으면 여기도 참고해봐. 후기가 좋은 곳으로 꼼꼼하게 찾았어."
아, 순례자가 많아졌지! 포르투 전까지 대부분의 알베르게는 예약하지 않고 방문했다. 방문했을 때 방이 남은 적은 있어도 없던 적은 없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온 다정한 자매들은 대책 없는 한국인 언니에게 본인들 숙소 주소를 알려주며 나의 숙박도 챙겨주었다. (저렴한 사립 알베르게였는데 컨디션이 좋아 깜짝 놀랐다.)
고마운 마음에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가방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믹스커피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짧은 쪽지와 함께 건넸다. 제이미가 뜯기 아깝다며 나를 꼬옥 껴안는다. "세실, 내일부터 못 본다니 아쉽다. 너의 다정함 기억할게. 부엔 까미노."
나는 내일 기차를 타고 다시 내륙길로 들어갈 예정이다. 걷는 것에 묶이지 않고 주어진 일정 안에서 원하는 길로 가기 위함이다. 혼자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다. 혼자여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불교 철학에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만남이나 사건이 특정한 때와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발생한다는 의미로, 억지로 노력하거나 강요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 즉 자연스러움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다. 물흐르듯 찾아온 시절 인연을 감사히 흘려보낸다. 이제 다시 내 마음에 귀를 대고 내가 가야할 길로 걸어간다. 인연이 지나간 자리에 또다른 인연들이 놀러왔다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