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를 약 1년 좀 안되게 보냈을 무렵, 내 아이는 내가 바라는대로 영어 귀가 트여 있었고, 스피킹과 아주 기본적인 라이팅이 되는 상황이었다. 단순한 의사 표현을 넘어 친구와도 놀면서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고, 영어 책을 읽고 이해하고 문제도 풀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문제를 푸는 어플리케이션인 ‘Raz Kids' 숙제를 할 때에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다 맞혔다. 이 부분은 내 아이가 영어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이전부터 한국어 책을 많이 읽어주면서 키워진 ’문해력’이 크게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특히 12월에 드라마 공연을 준비하고 끝내면서 아이는 많이 성장해 있었다. 금요일에 가기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한국말로 말하고 싶다는 말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아이 숙제를 봐주다가 b와 d를 아직도 헷갈려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 거의 200만원돈 가까이 영유에 내고 있는데, 이게 맞아? 싶었다. 숙제를 봐주다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아이를 째려보았다. 그리고 이 순간은 아이로 하여금 더더욱 ‘영어 숙제’가 싫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나도 인간인지라 언제나 평온한 마음으로 아이를 대할 순 없다.
아이의 영어 실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즐겁게 다시 잘 다니는 듯 했을 땐 나와 남편 모두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7세가 되기 직전 겨울에는 아이가 “원어민 선생님이 내년되면 더 힘들어진대. More homework래.“ 라는 말을 하면서, 선생님들이 내년에는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더 열심히 잘해야된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했다. 아이 친구는 엄마에게 ‘저 내년엔 다시 00 갈래요’라고 5세 때 다니던 일반 유치원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런걸 보면 영유에서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7세 과정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어민 선생님들도 나름 내년을 위해 아이들이 더 잘 준비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에서 한 말이었을텐데 아이들에게는 무언의 압박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미쓰 S가(원어민 선생님) 숙제 스스로 끝까지 해오래” 라고 하며 선생님한테 숙제를 제대로 안 해와서 혼났다고 시무룩해하는 아이를 봤을 때엔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실제로 2학기가 되며 숙제 양이 많아졌다.
1. 매 주말마다 써가야 하는 그림 일기
2. 한 주에 16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프린트 숙제
3. 책으로 된 숙제를 한 주에 5장 정도 풀어야 했고
4. 매주 라즈 키즈로 책 두권을 읽고 문제를 풀어야 했다. 이렇게 총 4가지 종류였다.
5. 이 외에도 이벤트성으로 영어 책을 읽고 써가야 하는 리딩로그도 있었다. 반별 대결이었고, 어느 반에 어느 여자아이는 책 천권을 읽고 적어냈다고 하는 소문도 접했다. 많이 읽은 아이는 그 만큼 반에서 뱃지를 많이 받을 수 있었고 이는 반 벽 한켠에 고스란히 붙어 모두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숙제가 이렇게 부담이 되니, 가끔은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아이의 숙제를 내가 해 줄 때도 있었다. 그걸 알고 선생님이 한 소리를 했던 것이다. (엄마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다 알게된 사실인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반에 두세명은 꼭 더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만큼 영어가 자연스러워지기는 했지만... 몇 가지는 좀 아쉬운 부분들이 있기는 하다. 내가 느끼는 잃은 점들은 정량적으로 수치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아이를 잘 알고 잘 관찰하던 엄마인 내가 정성적으로 느끼는 것들일 뿐이다.
- 내가 알던 해맑고 밝던 아이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
- 짜증이 늘었다.
- 국어/수학 학습지를 하고 있었는데, 숙제가 벅찼는지 그만두게 되었다. 특히 국어 학습지는 참 좋아했는데... 영어를 위해 다 접었다.
- 7세가 되고 교구 수학 학원에 가보자고 이야기했을 때, 가던 길을 돌아와야 했다. 상담 예약까지 해두었었는데 아이가 절대 안간다고 거부를 했다. 다른 모든 수학 학습과 관련된 학원은 절대 갈 수 없었다. 엄마가 하자는 것에 반감부터 생기는건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매일 하던 잠자리 독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리딩 로그를 위해서, 아이가 높은 레벨의 AR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다 보니 자연스레 국문 동화책 읽는 시간이 줄었다.
- 아이가 좋아하는 영상을 보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들이 생겼다. 왜 갑자기 한숨을 쉬는건지, 이게 일종의 틱인건지 아니면 소화가 안되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스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유를 정말 좋아하거나 좋아하진 않아도 잘 다니는 아이도 분명 있다. 그 아이들과 엄마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많은 노력을 해왔거나 그냥 좋다고 믿고 다양한 서포트를 해주며 쭉 버티는 것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아이가 영어를 영어 자체로 좋아하는 특출난 면이 있는 아이일 것이다.
나와 공감하는 엄마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엄마가 있을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습식 영유와 나의 아이 그리고 내가 잘 안 맞았던 것이다. 잘 맞기 위해 영유를 보내기 전부터 체계적인 준비를 했거나 내가 영유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철학이 있었다면 잘 다녔을까? 그 또한 모르겠다. 내 아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받아들였을진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