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만난 인연들 1편

이성과 감성 그 사이에서

by 시더루츠

잊혀지지 않는 인연이 있다. 내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연인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또 이웃집 할아버지도 있었다. 가깝게 지냈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짧은 만남도 강렬하게 기억되는 사람도 있다. 한편, 내 삶의 가치관을 흔들고 영향을 준 사람이라면 더더욱 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나의 수험생 시절 만났던 두 사람, A와 B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냉철한 이성의 A

A는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고, 상황을 빠르게 읽어 임기응변에 능했다.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인맥 관리에도 탁월했으며, 설득과 협상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나는 그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 자주 물어보고 의지했으며, 언젠가는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지나치게 계산적이어서 인간적인 따뜻함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유로운 감성의 B

B는 유쾌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여유가 있었고, 장난기가 많았다. 연예인으로 치면 탁재훈처럼 언변이 뛰어나 대화를 주도하는 재능이 있었다. 나는 그와 스터디 그룹에서 함께 공부했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지금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날 정도다. 당당하고,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에 감탄하며 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둘이 술자리를 가질 때면, 그는 뜻밖에도 인간에 대한 혐오와 삶에 대한 염세적인 태도를 드러내곤 했다.


A와 B 모두 말을 잘하고 개성이 뚜렷했지만 성향은 정반대였다. A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며, 머리로 그려가듯 체계적으로 살아가는 타입이었다.


반면 B는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맡기듯 수동적으로 살아가면서도 묘하게 자기만의 주관은 분명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했고, 특히 양심을 강조하며 인간의 악한 부분을 풍자하거나 일침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


둘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해 본다. 택시 승차 거부가 사회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야간에 번화가에서 택시를 잡으면 가까운 거리는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기사들이 승차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A와 B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A의 답변

“그럼 일단 나는 목적지를 애매하게 말하고 탄 뒤, 의자 뒤쪽에 붙여있는 택시 면허증을 사진으로 찍어. 그리고 집 주소를 말했는데 거부하면, 찍은 사진으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거지. 기사도 켕기니까 거부하지 못할 거야.”


역시 A다운 치밀하고 논리적인 방식이었다.


B의 답변

“나는 이거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술을 진탕 먹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우리 집이 가까운지 다들 거부를 하더라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또 거부를 당했는데 무심코 ‘기사님 안전 운전하세요’ 하고 웃으면서 말했거든? 그랬더니 갑자기 태워주더라고. 근데 그때 생각해 보면 전혀 그걸 의도한 게 아니었거든?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다만 뭔가 마음속에서는 양심을 건드리려고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해. 본인도 승차 거부가 잘못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거 아냐? 대부분은 돈 때문에 양심을 파는 일이 많으니.”


B다운 말이었다. 나는 웃음이 났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봐, 인간은 원래 병신이라니까 세상도 그렇고. 나는 그래서 성악설을 믿어."


재미있는 건 A는 늘 나에게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기부도 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행동은 철저히 계산 아래 이뤄진다는 점이었다. 한편 B는 매력적이고, 당당해 보이나 그 속에는 사람에 대한 상처와 불신이 가득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둘은 서로를 혐오했다. A는 B를 두고 “인생을 대충 사는 망나니, 입만 터는 새끼.”라고 깎아내렸고, B는 A를 “모든 것을 계산으로만 살아가는 인간미 없는 로봇 같은 새끼.”라고 조롱했었다. 나는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유순했고, 상대방을 잘 따르는 타입이었다. 아마 그런 성격 때문인지 A와 B는 나를 아껴주었고, 여러모로 잘해주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닮고 싶었고, 정말로 그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길이 아니었던지 좀처럼 내 맘대로 되진 않았다. 치밀하게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 가는 일도, 인생 뭐 있냐는 듯 당당하게 풍류객처럼 사는 것도 일도 내겐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혼란스러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은 이상적인 모습을 동경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같아 괴리감이 컸다. 한쪽은 현실에 순응하는 자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현실을 조롱하며 부정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다. 순응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서 결국, 다른 길을 가기로 정했다.


그나마 친숙했던 책을 통해 답을 찾고 싶었다. 정말로 세상이 잘못되어서 B가 옳은 것인지, 혹은 이 세상에 적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A가 옳은 것인지 알고 싶었다.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고, 나의 탐구는 표면에서 깊은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A와 B는 나의 여정을 못마땅해했다. A는 그것을 현실도피라고 말했고, B는 “인생은 어차피 별거 없는데 뭘 알려고 하냐” 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찾아야 했다. 머릿속에 아는 게 많아지자 그 둘과 마찰도 잦아졌다. 한 번은 내가 선문답을 탐구할 때 A는 “너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괴로워했고, 내가 명상센터에 가 일주일간 화두선에 참여한다고 하자 B는 “쓸데없는 짓”이라며 비웃었다.


이런 일들이 잦아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어졌다. 돌이켜보면 둘은 내가 기존의 관계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서 처음 만난 인연들이었고,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A에게서는 ‘끌어당김’을, B에게서는 ‘놓아버림’을 배운 셈이다.


나는 좋아 보이고, 멋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마주하면 늘 그것을 원했고, 그렇게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옷은 내게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졌더라도 나에게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즉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한때는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인간관계는 인연이 되어 만났다가 인연이 끝나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듯했다. 이러한 일들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나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굳건히 세워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지금의 나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 내가 나인 것이 좋다. 그동안 살아온 내가 좋고, 앞으로 살아갈 내가 좋다.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고, 성장해 가는 내가 좋다.


내가 쌓아온 경험과 깨달음은 이제 나만의 개성이 되어,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맞는 옷을 찾으려면 일단 무엇이든 먼저 입어봐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나 아닌 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단단해질 수 있었을까?


“당신은 어떤 옷을 입어보았는가? 지금은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가?”


내 옷이어도 좋고, 남의 옷이어도 좋다. 결국 당신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주게 되며 자신만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 주어라. 과정이 격렬할수록, 나의 옷은 한층 더 섬세해질 것이다.


그러니 가면 된다. 가다 보면 도달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삶의 모든 경험과 인연은 흩어진 구슬 같다. 그것을 꿰어내는 순간, 비로소 보배가 된다. 모으고 모으다 보면 결국 나만의 보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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