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줄곧 ‘원한다’는 개념을 현실에 적용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었고, 남들이 사회에서 말하는 방식대로 살아왔다. 그것들은 내가 원했는지 안 원했는지 알 턱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을지 모른다. 최근에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머릿속에는 늘 다양한 공상과 사고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들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추구만 했지 그것을 현실에 접목시키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졌던 생각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갖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고귀한 것을 창조하고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현실로 내려오면
레고를 조립해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것도 창조이고,
비즈니스를 확장해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도 창조다.
이상은 현실을 만나면 자주 깨진다. 그래서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모든 것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법처럼 갑자기 완성되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정말 그것을 원했는가?
나는 고귀한 것을 창조하길 원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레고로 창조를 원했는가?
모르겠다.
큰 비즈니스로 확장을 원했는가?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만족을 원했던 것인지,
과정을 원했던 것인지,
인정을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고귀함’이라는 이미지에 매혹되었던 것인지.
내가 순도 높은 창조라고 부르는 것의 근간은 가능한 한 물리적 제약이 적은 재료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예술을 선호한다. 글과 그림처럼 단순한 재료들. 그것이 나와 융합되어 나온 결과물은 곧 나와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 된다. 하지만 그것 또한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은 결국 펜과 붓을 통해 그려질 수밖에 없다. 현실과 접속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이하거나 공허해진다. 지나치게 추상적이면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결국 창조는 현실로 끌어내리는 작업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할 때
그 출발점은 어디인가.
결핍인가.
안정인가.
트라우마인가.
타인의 욕망인가.
혹은 TV 속 의사가 멋져 보여 의사를 원하게 되는 걸까?
많은 욕망은 외부에서 주입된다.
특히 집단주의가 강한 환경에서는
자신의 선호를 갖는 것 자체가 낯설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가 만들어놓은 욕망을 쫓는다.
이제 안정적인 대중 속에서 빠져나와 그 틀에서 벗어나면 문제가 시작된다.
나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기존의 기준은 사라진다. 참고할 길도 없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외면하면 삶 자체가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부딪히며 끊임없이 양보하고, 포기하고, 지키고, 조율한다.
완전한 이상도 아니고 완전한 현실도 아닌 그 사이를 시소처럼 오간다.
기준은 고통이 클 때마다 무너지고 경계는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과 사회는 통제할 수 없어도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할 수 없는 우리의 몸과 신경계는 자동으로 반응한다.
그보다 훨씬 늦게 등장하는 의식은 작고 연약해 보인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개입하면 의식은 결국 무의식을 재구성한다.
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자동 시스템과 의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조율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가 무엇을 원했냐고 물어보면 머뭇거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진정으로 원했느냐고 묻는다면
도덕이나 지식이 입혀지기 전의 날것의 대답이 튀어나온다.
그것은 생각 이전의 호르몬과 습관에 가까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체 속 이미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SNS, 드라마, 거리의 풍경, 연인들의 태도,
친구들의 표정과 제스처,
가족의 포옹 방식과 인사법.
이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마치 평범한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원하느냐고?
모르겠다.
원하지 않느냐고?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은 오직 경험뿐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경험을 원한다고 말하겠다.
지식이나 사고, 기존의 체제에 끼워 맞추지 않고, 그저 경험하고 느끼고 받아들이겠다.
그래, 나는 진정 나의 삶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