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여유를 배우다
방황하던 시절,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사람들은 태국을 추천해 주었다. 물가 저렴하고, 치안 안정되고, 자유로운 나라 태국. 결국 나는 태국으로 향했다.
특히 태국은 한국 사람들이 무비자로 3개월 머물 수 있는 나라였다. 첫 해외여행이었지만, 무려 석 달 동안 지내기로 정했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한국의 평범한 삶이 왜 그렇게 버거웠는지,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낯선 태국은 정말 더웠다. 처음에는 향신료 냄새와 무더위 속에서 뭘 먹을지 늘 고민했다. 태국 커뮤니티를 뒤지고 또 뒤져,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안전한 음식만 먹었다. 팟타이와 카오팟. 한 그릇에 30밧(약 1,200원)라 부담도 없었다. 음료는 수박 주스나 밀크티였다. 달고 맛있었다.
방콕의 화려한 사원에 감탄했고, 태국 사람들의 친절함이 좋았다. 그들은 늘 웃으며 나를 맞이했고, 덕분에 나도 긴장을 풀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알 수 없는 자유로움에 취해, 매일 미친 듯이 걸어 다녔다. 그러다 치앙마이에 가게 되었다. 숙소비를 아끼기 위해 장기 숙소를 구했다. 대학생들이 머무는 아파트를 한 달간 빌려 살았다.
단조로운 일상이 좋았다.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달달한 망고 주스를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 방콕과 달리 치앙마이는 한결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렇게 익숙해질 무렵, 작은 사건이 터졌다.
그때는 태국의 우기 시즌이라 소나기성 폭우가 잦았고, 가끔 정전이 되었다. 아파트 불이 통째로 나갔다.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밖에 나가니 사람들은 비를 피하며 서성였다. 우기라는 걸 알면서도 태국 사람들은 우산을 잘 챙기지 않았다. 그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귀찮아서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려 했지만 편의점도 정전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거리를 걷던 중, 낯선 가게 앞에 서서 비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밝게 웃고 있었다. 정작 우산을 쓴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방인임을 실감했다. 동시에, 어떻게 저 사람들은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생각도 잠시, 길을 걷다 발견한 미용실도 정전이었는데, 손님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내가 그 손님이었다면 짜증을 냈을 텐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폰 불빛을 들어 머리를 비추고 있었고, 미용사는 그 불빛에 의지해 작업을 이어갔다. 그 모습에 빵 터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분을 망치지 않겠다는 의지 같았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세상이 달리 보였다. 비가 온 덕분에 날씨는 시원했고, 빗소리는 아름다운 화이트 노이지 같았다. 사람들과 세상은 평화로웠다. 그제야 나도 이곳에 소속된 것 같았다.
기분 좋게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 들렀다. 그곳도 정전을 피하지 못했지만, 점원들은 익숙한 듯 촛불을 꺼내 테이블마다 놓았다. 순간, 평범한 레스토랑이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순간순간이 아름다웠다.
일체유심조(불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로,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
그 말에 딱 맞는 경험이었다.
이런 사소하지만 즐거운 일상이 많아지면서 태국은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