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비는 서로 지배하지 않는다.

의존도 아니고, 지배도 아닌 관계

by 시더루츠

관계에서 주도권은 분명 중요하다.
과거에는 남자가 능동적으로 끌어오고, 여자는 수동적으로 끌리게 했다.

하지만 현대의 관계는 다르다.
서로가 끌어당기고, 서로가 끌리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더 이상 남자만 주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주도권은 남성과 여성이 자연스럽게 번갈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리더와 팔로워의 역할이 유연하게 바뀌며,
그 속에서 배려와 이해, 존중이 스며들 때 관계는 깊어진다.


즉, 승패의 주도권이 아니라
상호 협력의 주도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나는 관계를 승부가 아닌 성장의 장으로 본다.

우리는 살아가며 배우고, 경험하고, 성숙해진다.
그 과정에서 가장 깊은 성장은 남녀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는 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사랑은
내면의 두려움과 방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랑으로 포장된 싸움은
결국 내 두려움과 마주하게 만든다.

놓지 못했던 것,
피하고 싶었던 것,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것들이
사랑 속에서 드러나고 정직해질 때,

나를 지배하던 두려움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내가 태어난다.


그때 관계는
누가 더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온전하게 하는 길이 된다.


그러나 이 지점을 이해하기 전의 관계는
항상 힘의 균형을 놓고 벌어지는 줄다리기가 된다.

개인 사이에서의 이 힘겨루기와 상처는
규모가 커지면 집단의 형태로 반복된다.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우위를 두고 다투어온 역사 속에서,
이 힘겨루기는 페미니즘과 남성우월주의로 확장되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결국 같다.
승패를 전제로 한 관계는 모두를 소모시킨다.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질문은 이거다.


누가 이기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설 수 있는가.


여성은 자신의 힘을 되찾으려 했지만,
그 방식은 남성의 방식(서열, 경쟁, 승패의 논리)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을 잃어버렸다.
지혜, 포용, 감각, 연결, 기르는 힘.

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앞서고 이겨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강함은
누군가를 이기는 힘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아나게 하는 힘이다.


반대로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과장하여 증명하려 했다.
내면의 섬세함, 감각, 유연함, 받아들이는 힘을
‘약함’이라 오해하며 외면했다.


그 결과
여성은 여성도 남성도 잃었고,
남성은 남성만 남은 채 반쪽이 되었다.

이제는 우열의 싸움이 아니라,
통합이 필요한 시기다.


현명한 여성은
남성을 억압하거나 꺾지 않는다.
그를 안정시키고, 존엄을 회복시킨다.

그녀는 남자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공간을 건네준다.
가능성을 재촉하지 않고,
그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도록 지지한다.


현명한 여성의 지혜는
남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현명한 남성은
여성을 통제하거나 소유하지 않는다.
그녀를 지켜주고, 귀하게 여긴다.

그는 여성이 느끼고 말할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머물 공간을 준다.

감정이 깊어질 때도
밀어내거나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 감정이 문제 아니라
그녀의 진짜 마음임을 알기 때문이다.

남성의 기둥은 벽이 아니라,
그녀가 안전하게 피어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중심이다.


현명한 남성 역시 여성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여성이 본래의 자신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서로를 왕과 여왕으로 세우는 관계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관계.


우리는 상대 안에서 ‘나’를 보기 때문에 깊이 존중하게 된다.

내가 될 수 있는 나,
잃어버렸던 나,
아직 피어나지 않은 나를.


그 인식이 서로를 귀하게 만든다.

그것은 힘과 사랑과 지혜가 함께 작동하는 상태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균형 속에서 선다.


왕과 여왕은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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