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먼저 반응하는 것은 생존이다
요즘은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라는 말이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 같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관계는 우연한 만남 → 연결 → 호감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우연으로만 관계를 맡기지 않는다.
만남 이전부터 환경을 조성하고, 이미 마음의 서사를 준비한 상태로 관계에 들어선다.
관계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핑퐁, 즉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자연스럽든 의도적이든, 그 과정에서 밀당이 발생한다.
누가 끌어당기고, 누가 끌리는가.
이 지점에서 주도권의 방향이 형성된다.
하지만 주도권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늘 두려움이 있다.
‘내가 더 좋아하면 지는 걸까?’
‘내가 너무 마음을 열면 버려질까?’
‘내가 약해 보이면 무시당하지 않을까?’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가슴이 아니라 생존이다.
우리는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버려질까 봐 두렵다.
우리는 평등한 사랑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통제권을 잃을까 봐 긴장한다.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와 자기 기반이 약할 때 생겨난다.
내 안의 일부가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 동정과 확인을 얻으려 하고,
때로는 더 높은 자리에서 우위를 확보하려 한다.
둘 중 하나로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관계 속에서 주도권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 속에서 무너질까 두려운 ‘나’를 지키려는 방어기제다.
우리는 성숙이란 서로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며,
관계를 평등하게 유지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내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히 생존감각이 건드려질 때,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틀렸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상대방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모두 내가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시작했던 사람은
어느 순간 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가 된다.
완벽했던 배우자가 모순투성이의 타인이 되고,
때로는 나를 위협하는 원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 사람은 그러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만큼 이해할 수 없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만큼 공감할 수 없으며,
내가 직면하지 않은 만큼 상대가 낯설다.
그리고 스스로 결국 묻게 된다.
이 두려움은 나의 것인가? 혹은 상대의 문제인가?
그 질문은 끝이 없다.
이 관계에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관계는 항상 함께 흔들리기 때문이다.
내가 이기면 상대는 져야 하고,
내가 지면 상대가 이긴다.
둘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내가 늘 이겨봐야, 결국 함께 진다.
왕이 되고자 한다면 여왕을 맞아들여야 하고,
여왕이 되고자 한다면 왕을 맞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위에 서고,
때로는 아래에 서며,
때로는 낙천주의자처럼 사랑을 포장하고,
때로는 염세주의자로 위장해 혐오로 도망친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의 순간,
살기 위해 만들어졌던 두려움을
다시, 살기 위해
우리는 결국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만큼은
모든 인간이 회피 성향을 지녔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