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집 꾸미기에 관한 유튜브를 자주 본다.
나는 전세나 월세로 살면 “어차피 나갈 집이니까 굳이 바꿀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는 손대지 않고, 바꾸지 않고, 그저 한동안 머물다 지나가는 공간처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전세든 월세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집을 바꾸고 꾸민다. 잠시 머물다 가더라도 그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며 스스로를 표현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밖에서는 못하지만, 집은 내 공간이니까. 여긴 내가 원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사회 속에서 억눌린 모습들, 말하지 못했던 취향과 욕망들이 집 안에서 살아난다. 그들이 공간을 이야기할 때, 표정엔 마치 어린아이처럼 빛나는 순수한 기쁨이 있었다. 자신이 왜 이 물건을 샀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 구조를 만들었는지, 그 모든 설명에 삶의 애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이 좋았다.
나 또한 내 집을 갖게 되면 틈틈이 기록해 둔 ‘나를 닮은 것들’을 하나씩 들여놓고 싶다. 혼자 산 지도 어느덧 10년차, 나는 옥탑방, 고시원, 원룸, 투룸, 쓰리룸까지 여러 공간을 지나왔다. 그 집들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각기 다른 시기의 ‘나’를 담은 기록들이었다.
옥탑방은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보겠다는 젊은 날의 다짐이었고, 고시원은 삶을 버티던 시기의 좁은 방패였다.
원룸에서는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투룸은 조금 더 나답게 살아보고 싶은 작은 욕망이 자라던 시기였다. 쓰리룸에서의 시간은 내 안의 여유와 부담, 책임과 자유가 서로 마주 보며 정리되던 때였다.
집마다 장단점은 있었지만 돌아보면 어느 곳 하나 쉬어가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곳들에서 나는 버티고, 회복하고, 다시 나아갔다. 공간이 바뀔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나다운 모습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 집들은 모두 한 줄로 이어졌다. 하나의 직선이 아니라, 단계처럼, 계단처럼 나의 성장을 밀어 올리는 구조로 말이다.
집을 꾸민다는 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는 기술이다 집을 꾸민다는 건 예쁜 물건을 들여놓는 행위가 아니다. 지친 나를 회복시키는 기술에 더 가깝다.
어떤 배치가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지,
어떤 조명이 있어야 눈이 부드러워지는지,
어떤 소품이 있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리듬을 알고 있다. 집 꾸미기는 그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식물을 들여놓고,
누군가는 향을 켜고,
누군가는 비워진 공간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 작은 선택들은 밖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집 안에서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다. 집에서의 선택은 오로지 나를 위한 선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들어올때, 서서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자기 취향을 아는 건 곧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이사할 나의 집 역시 또 하나의 확장이 될 것이다. 집이 커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만큼의 공간을 내 안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