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지만 마음으로 닿았던 시간들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미뤄왔던 첫 해외여행을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
늘 가던 태국이었지만, 혼자 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효도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나름 실수를 줄이고 싶어 더 많이 준비했다.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숙소와 일정들까지 꼼꼼히 챙기고, 어머니께 좋은 경험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계획을 세웠다. 늘 오후 비행기를 타던 나인데, 이번에는 시간을 아끼겠다고 아침 비행기를 끊어 새벽같이 움직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운 좋게 비어 있는 좌석에 앉아 편하게 올 수 있었고, 숙소도 생각보다 깔끔하고 위치도 좋아 마음이 놓였다. 날씨도 유난히 시원해 나들이하기 좋았다.
하지만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갈지 결정할 때마다 고민이 깊어졌다. 한국 어머니들이 해외에 오면 김치를 찾고 느끼한 음식에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가 잘 드실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잘 적응하셨고, 좋아하시는 태국 음식도 생겼다. 웅장한 사원들을 좋아하셨고, 자유로운 태국 사람들의 분위기에는 약간 낯설어하면서도 관심을 보이셨다.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자극이자 좋은 경험 같았다. 여행 중간에 다른 도시도 이동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중간중간에 어머니는 가끔 말이 없어지셨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 역시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 감정은 복잡했다. 아쉬움, 씁쓸함, 원망, 그리고 그 모든 밑바닥에 자리한 그리움.
대화가 적고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우리 가족은 사실 잘 노는 법을 모른다. 어떻게 해야 ‘즐긴다’는 감각을 느끼는지도 서툴다. 여행 도중 나는 어머니께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해외라는 낯섦과 두려움 때문에 편하게 즐기지 못하시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속마음을 쏟아내고, 어머니도 속얘기를 터놓고 나면 또 어느새 감정이 풀려, 맛있는 것을 먹으러 함께 걸어가곤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라서 조금 불편한 점도 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씀하기도 했다. 그 말은 꽤 마음에 남았다. 여행 중 만난 한국 어머니들 무리는 서로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고, 어머니도 또래와 함께 왔다면 더 편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엄마 또래와 왔으면 더 즐거웠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너 아니면 오지도 못했겠지”라고 하셨다.
고맙기도 하고, 무언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함께한 여행은 나에게도 뜻밖의 경험을 안겨주었다. 혼자 다닐 때는 느끼지 못하는 대화를 나누고, 서툴지만 서로의 속도를 맞추며 하루를 보내는 일은 나에게도 새로운 기억을 남겼다. 어머니 역시 이 여행을 통해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느끼고 계셨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나는 혼자였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크루즈 디너 투어를 계획했다. 후기를 보니 부모님들이 너무 좋아하셨다는 리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탑승한 배는 생각보다 조용했고, 바람은 부드럽게 불었다. 물결 소리가 바닥을 스치며,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은 잔잔하게 분위기를 감쌌다. 우리는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자 도시의 빛들이 물 위에서 흔들리며 길게 흩어졌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대접받는 감각’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자리가 아주 잠깐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머니도 말없이 그 빛을 바라보고 계셨다. 조명이 비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낯선 나라의 강 위에서 우리는 같은 표정을 짓고, 야경을 바라보았다.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뜨겁지도, 벅차지도 않은.. 그저 잔잔하면서도 은근한 황홀감이 마음을 깊게 감싸고 있었다.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하는 왓 아룬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하얀 탑은 어둠 속에서 무지개 빛깔로 영롱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취한 듯한 감정을 자아냈다. 사진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거 안 했으면 후회할 뻔했네. 더운 것도, 힘들었던 것도 다 잊어버릴 만큼 너무 좋구나.”
단순한 여행 소감이 아니라, 마치 삶에서 줄곧 외면해 왔던 즐거움의 한 조각을 다시 회복한 듯했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이해했다. 이 크루즈는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비어 있던 감정과 자리를 잠시 복원시키는 작은 의식 같은 것이었다는 걸. 그리고 우리는 서로 말없이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위로받고 있었다. 모든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어머니 덕분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놓친 것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서로에게 닿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오래 기억될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