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책을 꽤 많이 읽어온 편이다.
그럼에도 작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들을 떠올려보면
헤르만 헤세,
시인 루미,
칼 융 정도가 떠오른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인간의 깊은 내적 세계를 다루었고, 그 세계를 기꺼이 세상과 나눈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가벼운 책들도 물론 좋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면의 깊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책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쩌면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박식다학하며,
가장 정서를 잘 그려낸 글들이
‘좋은 작품’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추구하는 작가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가다.
잘 쓴 책,
열심히 쓴 책,
감동적인 책보다도
나를 힘들게 하는 책이 좋다.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마주해야만 하는 것들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주는 책.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지체 없이,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인내심은 줄어들었고
감각은 점점 편식쟁이가 되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과거에는 지적인 개념으로만 여겨졌던 이 태도가
이제는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방송 문화는 이러한 욕구를 민감하게 반영하며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고,
책 또한 그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 역시 잘게 쪼개진다.
각자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더 작고, 더 닫힌 공동체로 모여든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일상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이런 괴리감이 커질수록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불편한 것들을 치우고
익숙한 것들만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일.
물론 여기에는 장단이 있다.
장점은
우리가 더 이상
공동체의 시선에 얽매여
대중적인 것만을 좇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느낀다.
반면 단점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공동체 관념들이
조용히 말살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본 어쩌다 어른에서
미국인 부부 사회학자들은
한국의 공동체 의식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였다.
요즘이라면
웃기지도 않는 강아지 소리쯤으로
치부될지도 모를 이야기다.
하지만 과거 위기 상황에서
한국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잘 뭉쳤던 적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들 역시
개인주의와 서양식 자본주의 속에서
점차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 흐름은
아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더 냉정해지고,
더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거듭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 속에서
적어도 우리는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
외면하고 싶었던 질문들 앞에
한 번쯤은 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불편함을 피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작가가 좋다.
어쩌면 이런 책들은
나에게 맞는 말이지만 기분 나쁜 잔소리를
글로 아주 친절하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쓰지만 몸에 좋은 약처럼 말이다.
이제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불편함을 끝내 마주하고
그것을 통과해 나오는 순간이 온다면,
장담하건대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
위로해 주던 그 모든 책의
최소 열 배에 달하는 카타르시스를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부수고,
자신을 통과하며,
마침내 알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아주 낯설고도 강렬한 희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