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은 받아들이는 곳이다.

by 시더루츠

나는 MBTI 유형 중 감정 기능(F)이 강한 INFP 타입이다.
HSP 테스트 문항을 체크해 보면, 어느 정도 HSP 기질도 있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예민한 성향이고, 마음이 여린 편이며, 감정이 오래 남는다.

감정기복도 비교적 큰 편이다. 다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편한 사람들 앞에서만 나의 본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학창 시절부터 이런 성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억지로 잊어버리거나, 무뎌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상처로 남거나,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이런 고통이 잦아지고 축적되면서 성인이 된 후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납득하고, 이해하고, 원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성은 나의 방어기제가 되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들을 대신 처리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기도 하고,
동시에 거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해되거나 충분한 설명이 붙여진 일들은 감내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내 것으로 소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들,
알 수 없는 것들은 나를 극도로 괴롭게 만들었고
단 1초도 참을 수 없게 했다.


그렇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려는 탐구가 이어지면서
이성은 어느새 책 속 지식을 먹고 거대해졌다.
그리고 이윽고, 스스로의 감정을 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잣대는 점점 도덕적으로 강해졌고,
타인을 재단하는 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졌다.


다시 진퇴양난에 빠지자
나는 결국 감정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머리를 거치면 설명하려 들고, 잔소리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콩알만큼의 자비와 관대함을 허락했을 때
내면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고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났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수용성과

조금은 내려놓아도 된다는 여유가 생겼고 스스로에게도 관대해졌다.

정확히 내가 나를 보는 만큼, 세상과 타인에게도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갈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이어졌다.
문제가 해결되면 더 깊은 곳의 문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좋게 말하면, 점점 더 깊은 무의식의 문제들이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드러난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이 작업은 끝이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에는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도 했다.
뾰족한 물건을 보면 그것이 나를 찌르거나 공격하는 이미지가 떠올라
몹시 괴로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나는 내가 다 헤아리지 못한 불안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불안은 너무 두려워 꺼내고 싶지도 않았고,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후회와 좌절, 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머리로 설명하고 이해하고 납득한 것들은 사실 머리에서만 소화되었을 뿐,
가슴과 몸으로는 소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들은 해결하려 애쓸 대상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느껴주고
놓아주어야 할 것들이었다.


마음속에 안정감이 들고,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흡수할수록
머리가 과하게 작동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현상은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다.


불면증, 예민함, 분노 조절의 어려움, 공황 증상과 신경계 문제들도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두렵고 내가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이 과정들이 결국 나에게 약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해하려 애써왔던 나와, 이제는 느끼는 법을 배우는 나를 함께 데려가는 과정.

그것이 나를 알아가는 길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