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의 시대, 인간의 선함을 지킨다는 것

오징어 게임 vs 도박묵시록 카이지

by 시더루츠

나는 학창 시절 일본 만화책을 많이 보고 자랐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루는 작품들이 많았고, 그 결은 한국 작품과 확연히 달랐다. 일반적인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 경제학 책을 읽고 나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곤 했다. 일본 사회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이미지에 비교적 많이 얽매여 있는 편이고, 그래서인지 책이나 작품 속에서는 억눌린 감정과 욕망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다.


일본 사회는 예의를 중시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이상으로 삼는다. 감정과 생각의 표현을 절제하지만 책임은 철저히 개인에게 귀속된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개인에게 지속적인 긴장과 압박을 요구하며, 그 결과가 일본 작품 특유의 극단적인 서사로 이어지는 것 같다.


한편 한국의 경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태도는 비슷하지만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전가하는 문화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일본에 비해 공동체적 교류도 훨씬 많은 편이다. 흔히 말하는 ‘한국인의 정’처럼, 집집마다의 사소한 일부터 개인적인 사정까지 공유하는 문화는 일본인의 시선에서는 특이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이러한 차이는 드라마나 만화처럼 다수가 동시에 소비하는 콘텐츠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작품 중에서 글보다는 영상에서 이러한 성향들이 더 자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일본과 한국의 성향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오징어 게임〉과 〈도박묵시록 카이지〉다.


두 작품의 주인공인 성기훈과 카이지는 어리숙하고,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철없는 어른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사고를 치고도 뒷일은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정과 따뜻함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다. 둘은 비슷한 경로를 거쳐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상류층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이 지점부터 두 작품의 태도는 분명히 갈라진다.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은 크게 육체적인 힘을 중시하는 유형, 논리로 맞서는 유형, 그리고 마음을 중시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참가자들은 생존과 불확실성의 제거를 위해 자신이 가진 자원을 총동원한다. 초반에 탈락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눈치가 없거나 운이 없고, 혹은 마음이 약한 경우가 많다.


힘과 머리를 중시하는 유형에서는 더 강하고 영리한 인물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이들은 서로를 이용하거나 배신하며 생존 확률을 높인다. 그 과정에서 성기훈은 힘도 머리도 어중간하고 마음은 약하지만, 유난히 운이 따라주며 살아남는다. 결국 그는 우승자가 된다.


그렇다면 감독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착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였을까. 작품은 ‘선함이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까지 선을 선택하는 주인공을 그려낸다.


반면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비슷한 주인공을 훨씬 더 미련하고 무력하게 묘사한다.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하며, 선을 택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카이지는 끝까지 세계관 속 약자로 남아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두 작품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서 드러난다.


성기훈의 세계에서는 선함이 끝내 보상받을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카이지의 세계에서 선함은 살아남더라도 존중받지 않는다.


카이지가 내세우는 철학은 명확하다. 약육강식, 그리고 어설픈 정은 미련함이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주인공을 불쌍하게 보는 인물들의 도움으로 카이지는 운 좋게 살아남아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나는〈도박묵시록 카이지〉가 일본 사회의 제도주의적 사고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사회에서는 국가, 사회, 개인의 역할이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물론 공동체적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책임을 분배하는 기준은 한국이나 일본과는 다르다.


일본은 서양식 사고와 동양식 사고가 혼합된 형태에 가깝다. 비교적 빠르게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며 제도와 구조를 정비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고유한 정신적 정체성은 흔들리기 쉬웠다. 서양식 자본주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동양 특유의 정신문화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채, 그 부담은 결국 개인에게 전가된다.


한국은 이와 달리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국가가 도와주고 사회가 책임진다는 인식이 일정 부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과 같은 제도는 자본주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다만 현세대에 이르러 이러한 인식은 동양식 사고와 서양식 사고의 충돌 지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립과 책임, 의존과 연대, 개인과 국가의 역할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질문들이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자본주의의 영향 속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개인주의가 확산되는 방향을 선택해 왔다. 그러나 한국은 서양식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사람다움’과 ‘정’을 쉽게 내려놓지 않았다. 이 지점은 세계의 여러 학자들이 주의 깊게 관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이 끝내 담아내지 못한 지점도 있다. 그것은 ‘한계’다. 서양식 자본주의를 온전히 품어내지 못한 채, 철없는 주인공의 선함을 극단적으로 시험해 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서인 ‘정’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정을 나누는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를 유지해 왔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작은 희망으로도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성기훈처럼 인간다움과 선함을 끊임없이 시험받고 참아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의 정을 외면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길로 나서기도 하며, 누군가는 결국 양심에 찔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해 보듯 산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성기훈일 수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에는 사랑이 많고, 그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과 함께, 때로는 그것을 ‘정’이라 부르며 불편한 관심이나 간섭으로 표현하는 양면성도 공존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공동체주의가 주는 피로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한편, 개인주의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다. 불필요한 정과 감정적 관계를 줄이려는 시도와 함께, 외로움이 관계로 인한 고통보다 낫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공동체도 개인주의도 완전히 선택하지 못한 채 둘 다에 지쳐 있는 세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실험과 고민을 지금 이 시점에서 감당하고 있는 집단이 한국 사회라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동양식 공동체주의의 장점과 서양식 개인주의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며 균형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 모든 개인의 내면에는 한국인의 ‘정’과 닮은, 따뜻하고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이미 자리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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