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7일 금요일

두 번째 날, 길은 사람으로 이어졌다

by 최규성

정확히 7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주머니께서 깨우러 오신 것이다. 잠욕심이 많은 나는 좀처럼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신부님께서 직접 오셨다. 신부님은 늘 아침으로 누룽지를 드신다며, 등산을 가신다고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나가셨고, 나 역시 짐을 정리해 사제관을 나설 준비를 했다.


인사를 드리자 아주머니께서 무거운 짐은 맡기고 가라 하셨다. 나는 코펠과 라면, 부탄가스를 맡겨두고 감사 인사를 드린 뒤 성당을 나섰다. 몸은 가벼워졌지만, 오늘의 목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목적지는 당진. 발안으로 이동한 뒤,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당진까지 가는 루트였다.


수원역으로 향해 사람들에게 발안 가는 길을 물으며 걸었다. 문제는, 물어보며 걷다 보니 너무 지나쳐 버렸다는 것이었다. 분명 놓칠 리 없는 길이었는데, 결국 지나쳐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되돌아가며 표지판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알고 보니 발안 방향은 인도로는 막혀 있었고, 지하차도를 통해서만 연결돼 있었다. 나는 지하차도로 내려가며 엄청난 양의 먼지를 들이마신 끝에, 겨우 발안으로 향하는 길 위에 다시 올라섰다.

전날의 피로는 여전히 몸에 남아 있었고, 발에는 물집까지 잡혀 있었다.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첫 번째 히치를 시도했다.


‘무전여행중’이라고 적힌 카드 뒤, 빈 여백에 보드마카로 ‘발안, 당진 태워주세요’라고 써서 가방에 붙였다.

걷기 시작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소방 앰뷸런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너무 쉽게 성공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소방사분들은 캔커피를 건네며 여행 중 힘들 때 쓰라며 에어스프레이까지 챙겨주셨다. '망해사'라는 절도 한 번 가보라며 추천해 주신 뒤, 발안에서 나를 내려주셨다.


발안에 도착한 뒤, 나는 걸어서 발안 톨게이트로 향했다. 톨게이트 직원분이 다가와 물었다.


“고속도로로 걸어가실 건가요?”


“아뇨. 걸으면 안 되는 건 알아요. 여기서 차를 얻어 타야죠.”


카드를 ‘당진, 서산 태워주세요’로 고쳐 적고, 트럭들만 들어가는 쪽에 서 있었다. 20분쯤 지나자 트럭 한 대가 멈춰 섰고, 나는 그 차를 타고 단번에 당진까지 날아왔다. 아저씨는 어디서 내려주면 좋겠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 데나 괜찮다고 말했다. 마침 그때, 도로를 가로질러 달리는 오소리 한 마리를 목격했다. 그날의 뜻밖의 장면 중 하나였다.


차에서 내리니 길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른쪽을 택했다. 그런데 계속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논과 밭, 산과 작은 개울뿐이었다. 소가 울고, 개들이 나를 보고 짖어댔다. 도로가 지겨워 논둑으로 들어서자, 한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여기서 뭐한데요?”


“여행 중입니다.”


“아… 그래요?”


할머니는 기계를 만지다 말고, 저쪽에서 손짓하면 전기를 올려달라고 부탁하셨다. 못할 이유가 없어 도와드렸다. 나는 은근히 점심을 기대했지만, 할머니는 감사 인사만 남기고 다시 일에 몰두하셨다. 결국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산 너머로 아파트 단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상아파트, 커다란 코끼리 아파트. 나는 중앙 정자에 앉아 지도를 펼쳐놓고 쉬고 있었다. 그때 옆에 앉아 계시던 또 다른 할머니가 내 짐을 보시고 말을 거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점심을 못 먹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할머니는 자기 딸이 식당을 한다며 같이 가자고 하셨다.


식당에 들어서자 딸로 보이는 분이 처음에는 다소 날 선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밥이랑 김치만 주면 된다”며 나를 감싸셨다. 결국 나는 고깃집에서, 고기 없는 진수성찬을 대접받았다. 무전여행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분위기는 금세 바뀌었고 관심과 응원이 따라왔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에 올랐다.


지도를 다시 펼쳐보니, 아까 왼쪽 길로 갔으면 한 번에 왔을 거리였다. 괜히 오른쪽으로 돌아 한 바퀴를 크게 돈 셈이었다. 근처에 잘 곳도 마땅치 않아, 운산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또다시 차를 얻어 탔다. 이번 아저씨는 여행 팁을 쏟아내듯 알려주셨다. 물집 짜는 법, 밴드 붙이는 법,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는 말, 가끔은 막일로 경비를 마련하라는 이야기, 양말 빠는 요령까지. 하지만 목적지 운산이 아닌, 해미에서 내려주셨다. 해미읍성이 멋있다며 꼭 보라고 하셨다.


해미읍성 앞에서 설명문을 읽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읍성을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말투와 행동이 조금 어눌했지만, 읍성에 대한 설명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설명 도중 그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고기를 사 드리고 싶다며, 누가 만 원만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내가 끝난 뒤, 결국 나에게 직접 부탁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바로 다른 관광객에게 다가갔다. 씁쓸한 기분으로 잠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해미 읍성



어렵지 않게 해미 성당을 찾았다.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무전여행중이라 혹시 하루 머물고 갈 수 있을지 여쭤봤지만 신부님은 단호하셨다.


“이곳은 사람을 재워주는 곳이 아닙니다.”


더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인사만 드리고 나왔다. 해미성지, 교회도 차례로 찾아갔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날은 어두워지고, 아파트 옥상에서라도 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작은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안에는 할머니 한 분만 계셨다. 사정을 말씀드리자, 8시쯤 목사님이 오니 그때 다시 오라고 하셨다. 갈 곳이 없던 나는 근처에 앉아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8시 10분, 다시 교회를 찾자, 사정도 꺼내기 전에 들어오라고 하셨다. 할머니께서 미리 말씀을 전해주신 듯했다.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했고, 예배당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목사님은 가끔 부랑자는 찾아오지만, 학생은 처음이라며 오히려 부담이 적다고 웃으셨다.


그날 밤, 나는 다시 한번 낯선 친절에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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