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6일 목요일

돌아가지 않기로 한 아침

by 최규성

꿈부터 불길했다.

여행을 떠났는데, 어느 순간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꿈이었다. 괜히 마음이 쓰였다. 출발도 하기 전에, 이미 마음은 한 번 되돌아온 셈이었다.


아침 7시. 알람이 울렸지만 모른 척 이불을 끌어당겼다. 두려웠다. 몇 년 전부터 꿈꿔온 일이었지만, 막상 출발선에 서자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혹시 중간에 포기해버리지는 않을지. 그래도 여기까지 준비해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라.”

아버지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여행의 첫날이 시작됐다. 긴 여정이 될지도 모르니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이미 두 분은 외출하신 뒤였다. 문득, 정말 혼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배낭을 다시 정리하고 무게를 쟀다. 10kg. 숫자만 보면 대수롭지 않았지만, 어깨에 메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집을 나선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어깨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여행은 생각보다 빨리 몸으로 다가왔다.

출발 후 30분쯤, 탄천이 나타났다. 탄천을 따라 오리까지 걷고, 다시 수원 방향 도로로 빠져나왔다. 중간에 이마트에 들러 모기약을 사고, 빵 코너에서 시식도 조금 했다. 계속 걷다 보니 뜻밖의 장소를 만났다. 조광조의 무덤. 무덤 앞 신도비에는 총알 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세 군데 남아 있었다. 정말 총알 자국일까. 쓸데없는 상상에 혼자 잠시 흥분했다.


정오쯤이면 수원에 도착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표지판을 본 건 세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이미 몸은 녹초였다. 발은 저려왔고, 한 걸음 한 걸음이 고역이 됐다. 그래도 목표는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다시 이를 악물고 걸었다.


30분쯤 더 걸어 도착했지만, 표지판을 잘못 본 탓에 경기장 뒤편 밭으로 넘어와 버렸다. 길을 잘못 든 것도, 그걸 되돌릴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모두 현실이었다.


마침 경기장 앞 작은 운동장에서 팔달구 주민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나는 그 흥겨운 분위기에 슬쩍 섞여 음료수 한 잔을 얻어 마셨다. 전날 축구 경기가 있었는지, 청소 인력들이 경기장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두들 자기 일에 바빴고, 나는 그 사이를 조용히 지나가는 이방인이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보려 했지만, 모든 문은 잠겨 있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자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날카롭게 나를 바라봤다. 출입금지라는 분위기였다. 결국 ‘몰래 들어가기’라는 최후의 선택을 했다.

자물쇠가 허술하게 채워진 문 하나. 들킬까 숨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일단 화장실로 숨어 숨을 고른 뒤, 재빠르게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경기장을 구경하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더 민망해졌다. 나만 영화 속 인물 같았다.


경기장을 나와 공원 화장실에 들렀다가 또 한 번 당황했다. 할머니 한 분이 남자 소변기 앞에 서 계셨다.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어색한 웃음이 나왔고, 나는 슬며시 뒷걸음질쳤다. 여행은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장면을 계속 던져주었다.


이후 수원 화성으로 향했다. 북쪽에서 남쪽 팔달문까지, 천천히 성곽을 따라 내려왔다. 해가 기울 무렵, 슬슬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수원역에서 밤을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물었더니, 아주머니들께서 유난히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여행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이시더니 “힘내라”며 자이리톨 껌을 건네주셨다. 그날의 첫 수확이었다.


걷다 보니 역보다는 성당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물어물어 고등동 성당에 도착했다. 사무실 직원분께 사정을 설명했지만, 역전 근처라 도난 사고가 많아 세콤이 설치되어 있어 외부인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수녀님과 신부님께 다시 말씀을 드렸다.


잠시 후, 신부님께서 사제관에서 묵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사제관 아주머니께서는 라면과 만두, 밥까지 내어주셨다. 낯선 도시에서 받는, 과분할 만큼 따뜻한 저녁이었다. 방에 들어와 발을 보니 물집이 다섯 군데나 잡혀 있었다. 실로 조심스럽게 터뜨리고, 짐을 정리한 뒤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여행의 첫날.

두려움과 무모함, 낯선 친절과 작은 성취가 뒤섞인 하루였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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