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좀 좋아하면 안되나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by 도토리


대학을 졸업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은 저 멀리 뒤편으로 밀려났고, 나는 지금 아홉 살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전업주부가 되어 있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 주고, 도서관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혼자 공원을 걸으며 하루의 숨을 고른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스무 살의 나는 서른의 내가 조금 더 근사할 거라고 믿었다.
또각거리는 구두가 어울리고, 야외 카페에서 바쁘게 점심을 먹고, 정신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삶을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전히 청바지에 후드티, 운동화에 에코백을 든 채 일상을 산다.
가방 속엔 물티슈, 휴지, 볼펜, 노트, 물통, 차 키, 소설책 한 권. 딱 그만큼의 삶.

살림살이는 늘었어도 마음의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몸무게 25킬로만큼 이 세계에 더 ‘묵직하게’ 존재하게 된 것 정도랄까.


세월이 흐르며 기억들도 자꾸 희미해졌다.
원래도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지난 일을 오래 붙잡지 않는 성격이라—친했던 친구 이름도, 오래 살던 동네도 안개처럼 멀어졌다.
마치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오직 지금만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알고리즘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꽃다지의 〈바위처럼〉이 흘러나왔다.
순간, 오래 덮여 있던 기억이 부스스 깨어났다.
멜로디가 스쳤을 뿐인데 마음 깊은 곳이 울렁였다.


그래.
나에게도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분노했고, 연민했고, 불합리함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때.
박노해 시인의 ‘혁명가가 살지 않는 가슴은 스무 살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그 시절의 내 심장과 정확히 포개졌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였고, 우리는 그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거창한 건 없었다.
거창한 이념도, 명징한 사상도, 사실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그저, 낭만이 넘치던 한 명의 청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 어설픈 길 곁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에겐 언제나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들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되감기듯 돌아간다.
대학 잔디밭에서 기타 한 대에 기대 몇 시간이고 웃고 떠들며 막걸리를 마시던 봄날. 벚꽃잎이 얼굴 위로 흩날리던 순간들.
비 오는 날 젖어가는 것도 잊은 채 취기와 젊음에 기대 빗속을 뛰어다니던 친구들.
뜨거운 여름 날 농촌 봉사 활동에서 50대 청년회장님께 받아 마신 막걸리에 취해 고추밭 고랑에 숨어 잠들던 동료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아이는 있을까.
다들 어른이라는 가면을 쓰고 저마다의 위치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까.


문득, 문득, 가슴이 조용히 묻는다.
그래서 나는 노래로 그 시절을 불러내려 한다.
노래만이 그때의 나를 가장 선명하게 데려다주니까.


하지만 ‘민중가요 좋아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잠깐 머뭇거린다.
시위 현장에서 나오는 노래 아니냐고 조심스레 묻기도 한다.


민중가요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멜로디만 들으면 누구나 신나게 몸을 흔드는 Chumbawamba의 <Tubthumping>도 사실은 민중가요다.


https://youtu.be/-G_1qKY57VY


나는 원래 가사가 귀에 들어오는 노래를 좋아한다. 가사를 곱씹는 것을 좋아해서, <김광석>, <김광진>, <유재하>, <안치환>, <산울림>, <이문세>, <이상우>, <양희은>, <장필순> 등의 가수를 좋아한다. 80년대생이지만, 또래들보다는 취향이 조금 더 올드하다고 볼 수 있다.
계속 사랑과 이별을 순환하는 대중가요엔 마음이 잘 가지 않았고, 영어 가사로 가득한 최신 팝송은 내 비루한 리스닝 실력으로는 도통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시처럼 쉽게 와닿는 민중가요를 좋아한다. 소위 빡센 노래는 좋아하지 않는다. '민중가요를 다루면서 왜 이 노래를 이야기 하지 않나요?' 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어쩔 수가 없다. 내게 추억의 장면으로 머물러있던, 그 순간의 노래들만 다룰 예정이기 때문이다

〈민중가요 좀 좋아하면 안되나요?〉는 바로 그 고백에서 시작된 글이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이 취향을 숨기고 싶지 않다.
그때 우리가 함께 들었던 노래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을 내 방식대로 다시 한번 불러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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