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 만난 노래, <바위처럼>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by 도토리



"여기에 연고는 있어요? 왜 우리 학교에 지원했지?"


긴장된 분위기의 수시 면접실. 동그란 안경을 쓴 교수님이 내 주소와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경기도에서 초중고를 졸업했고, 그곳에 어떠한 연고도 없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나는, 절박하게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릴 용기도, 그렇다고 집을 나설 용기도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대학 진학뿐이었다. 집에는 비밀로 하고, 지도상 가장 먼 곳의 학교에 지원했다. 서울 소재 학교도 몇 군데 합격했지만 등록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왜 그렇게 먼 국립대를 가려하느냐?”며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했다. 반드시 통학이 불가능한 물리적 거리를 가진 대학교여야 했다.


수시 면접도, 신입생 OT도 KTX를 타고 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덥다는 그 도시는 내게 너무 낯설었고, 모두가 내 말투를 신기해했다. 그들에게 나는 경기도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그들이 친근하게 건네는 인사말에도 나는 긴장했다.

말 끝마다 붙이는 "맞나?"라는 사투리는 '뭐가 맞다는 건지' 내게 혼란으로 다가왔고, ‘거 정구지 좀 더 달라 캐라’라는 선배의 요구에 부리나케 상추를 들고 와 '일마 이거 쳐 돌았나'하며 혼나기도 했다. 부추를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곧 나는 그곳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해물파전에 찍어먹는 초장은 해물 맛을 살려줬고, 숨 쉬듯이 먹는 삼천 원짜리 돼지국밥과 찜닭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학교 정문 앞 매참 김밥(매운 참치 김밥)은 별미였고, 난생 처음 먹어본 파닭은 왜 그렇게 맛있는지. 다 먹는 기억만 남아있는 듯 하지만, 낯선 친구들과 함께하는 기숙사 생활도 설렘으로 가득했다.


신입생 OT에서 한 남자아이와 친해졌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사람들 앞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가졌고, 내게는 그 떨림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남자 동기들처럼 마초적이지 않았고, 술에 취해 과하게 떠들지 않았다. 그는 조용했고 이따금 미소지었다. 짧은 대화에서도,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깊이와, 책과 세계관에 푹 빠져들었다. 여학우들에게 당연시되었던 잔심부름과, 술 한잔 따라보라는 문화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나에게 "선배님, 제가 따라드릴게요."라고 나를 살짝 어깨로 밀치던 그의 듬직한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선배들 앞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뚝심을 가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사라져 가는 이 시대의 마지막 운동권 학생이었다. 늘 헤게모니에 대해 논했고, 권력층 앞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마초적인 복학생 선배들이 웃통을 벗고 침을 뱉으며 단대 앞에서 족구를 할 때, 불편해 하던 우리들이 단대 후문으로 다니는 모습을 본 그는, 여학우들이 불편해하니 옷을 입어주시면 어떠냐고 총대를 메고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왜인지 모르게 그가 더 단단하고 특별해 보였다. 그는 선배들의 미움을 샀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나는 늘 대학 시절의 낭만을 통기타에서 찾고 싶었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통기타를 치며 막걸리를 마시는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낭만의 통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종종 잔디밭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내 대학 시절의 전부였고, 그를 빼고는 지난 4년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순간들은 내 대학 생활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그를 남자로 사랑했나? 그건 아니었다. 그와 손을 잡고 영화관 데이트를 하거나, 팔짱을 끼고 시내를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입을 맞추거나, 영원토록 함께하는 상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나의 세계관을 확장시켜 준 하나의 존재였고, 당시의 나에게 큰 울림을 준 이였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불합리함과 차별 앞에서 그는 참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를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2박 3일 새내기 캠프가 시작되자, 나는 그와 함께 서 있었다. 수천 명의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운동장 한가운데서도, 그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조금 더 용감해졌다. 선배들이 짜 준 조로, 우리는 ‘취직에서 실패하는 인문대생’이라는 말도 안되는 연극을 하고, 단 몇 시간 만에 평생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해졌다. 펼쳐진 과자봉지, 종이컵에 담긴 김 빠진 맥주, 긴장하며 차례가 오지 않길 바라던 장기자랑 시간들 속에서도, 그의 존재가 나를 안정시켰다.


밤이 되자 화려한 공연과 함께 캠프파이어가 시작되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로 솟구치고,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도 사람들의 열기로 운동장은 달아올랐다.

그때, 드럼과 피아노 소리가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고 경쾌한 리듬이 운동장 전체로 퍼졌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 바람이 몰아친대도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어린이 동요 같기도 한 그 경쾌한 노래 선율이 별안간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선배들은 능숙하게 노래에 맞춰 웃으면서 율동을 하고 있었고, 나는 '아, 이것이 대학의 춤이구나!' 하며 어설프게 따라했다. 평생 춤이라고는 춰본 적도 없는 내가, 어색한 몸짓으로 춤같은 것을 춘 것이다.

양 엉덩이를 툭툭 치고, 손을 데굴데굴 굴리며 총총 뛰는 내 모습에 동기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사도, 동작도 어설펐지만, 우리는 무작정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무릎을 세우고 외치는 “아~싸 아싸 아싸 예!” 구호를 외치고 두 손을 하늘로 뻗는 순간 온몸이 해방되는 듯했다.

반복되는 노래, 잔뜩 오른 취기, 하늘에서 터지는 형형색색의 불꽃들과 맞물려 대학 시절의 낭만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억눌렀던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무게, 숨죽였던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그의 옆에서 느낀 이 해방감과 설렘은 내 젊은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민중가요라는 장르도 모른 채, 첫 민중가요 <바위처럼>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자유와 열정으로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https://youtu.be/gEQJhcsnjKs?si=CdjGINYy9GmbTVju


<꽃다지_바위처럼>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 친대도
어떤 유혹에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니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추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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