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시절, 나는 처음으로 선배들을 따라 농촌봉사활동에 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농민–학생 연대 활동’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90년대 이후 대학의 탈정치화와 운동권의 퇴조로 예전의 결은 거의 사라진 뒤였기에, 이제는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는 ‘봉사활동’에 가까운 형태였다.
우리 대학의 농활 역시 운동권 선배 몇몇이 주도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던 우리는 그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기에 바빴다. 지금은 집에서도 안 입을 촌스러운 주황색 단체 티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팔토시까지 끼웠다.
터미널까지 마중 나오신 ‘50대 청년’ 이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트럭 짐칸에 올라타 뜨거운 햇빛과 경쾌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난생처음 트럭 뒷자리에 타본 우리는 신기함과 설렘에 엉덩이가 아픈 줄도 몰랐다.
도착하자마자 마을회관에 짐을 풀고 함께 생활할 규칙을 만들었다. 방이 하나뿐이라 ‘서로 어떤 불쾌한 일도 생기지 않게 노력하자!’가 규칙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부추와 김치 등 양손 가득 사 온 재료로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부침개를 부쳐 어르신들께 첫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OO대학교에서 봉사활동 왔어요! 일손 필요하시면 청년회장님께 말씀해 주세요! 학생들 많이 왔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없는 일도 만들어서 시키셔도 돼요!”
“아이고, 젊은이들이 동네에 오니까 분위기가 확 살아나네!”
우리의 부침개 솜씨는 끔찍했지만, 어르신들은 유쾌하고 다정하게 받아주셨다.
아침이면 청년회장님이 오셔서 일감을 나눠주셨다. 고추밭, 참깨밭, 옥수수밭, 수박밭. 며칠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가며 일했다. 대부분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새참으로 받은 막걸리를 한 잔, 두 잔 마시다 고추밭고랑 사이에 누워 기절하듯 잠들기도 했다.
어떤 선배는 밀짚모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면 멀리서 보면 꼭 일하는 사람의 머리처럼 보인다며 ‘꿀팁’을 전수해 줬다. 사실 본인만 빼고 모두가 '점마, 저거 또 디비자노' 하며 알던 사실인데, 끝까지 들키지 않았다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선배를 보며 킥킥 웃었던 기억도 있다.
우리는 선배들의 요령을 알 리 없어, 언제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빨리 하는 것이 능사’라고 믿으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일했다. 고추밭에는 왜 그렇게 잡초가 많던지. 고추는 햇빛을 많이 받아도, 적게 받아도, 조금만 병이 돌아도 죽는다니… 하루 일을 끝내고 반찬 삼으라며 챙겨주신 고추를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와 눈물 나게 맛있게도 먹었다.
옥수수밭에서는 무림 고수라도 된 듯 옥수수 사이를 휘저으며 유치한 칼싸움을 했고, 수박밭에서는 수박을 실은 수레를 와르르 쏟을 뻔해 밭주인 할아버지께 혼나기도 했다. 작은 아기 수박을 쓰다듬으며 사진 찍던 순간도, 끝도 보이지 않는 깻잎을 따다 머리가 핑 돌던 순간도 아직 생생하다.
또 다른 날, 우리는 새내기들끼리 아이디어를 모아 마을 여사님들만 회관에 따로 모셨다. 가방 가득 챙겨 온 팩을 얼굴에 올려드리고 정성껏 마사지를 해드리며 여사님들의 이름을 물었다. 늘 누군가의 어머니, 며느리, 아내로만 불리던 분들에게 ‘이름’을 찾아드리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이름표를 만들어 드리고, 농활 기간 내내 장난스럽게 “OO 씨!” 하고 불렀다. 혹시 버릇없다고 언짢아하실까 걱정했지만, 우려와는 달리 오랜만에 되찾은 이름에 진심으로 좋아해 주셨다. 그중 80대 할머니 한 분은 “결혼하고 누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줬다”라고 하셨다. 그 말이 우리에게 참 오래 남았다.
농활 내내 우리는 저녁도 되기 전에,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5시쯤이면 이미 취해 있었다. 청년회장님은 자신의 삶을 펼쳐놓으며 계속 우리의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주셨고, 선배들은 요령껏 피해 마시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피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하다 들어와 달뜬 얼굴로 마시는 막걸리는 정신을 차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술이 한껏 오른 어느 순간, 선배들이 외쳤다.
“우리, 나가서 춤추자!”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도 따라 나갔다. 속이 후끈거려 더웠기 때문이다. 선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후끈한 마을회관을 벗어나 평상에 앉자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간질였다.
그때 <새물>이라는 노래를 만났다.
마흔이 되어 추억을 더듬으며 검색해 보니 NL계열 민중가요라는데, 그때의 새내기가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그저 막걸리 취기와 선배들의 춤사위를 따라 하며 어설프게 박자를 맞출 뿐이었다. 중간에 '우린, 두렵지 않아!' 하는 가사가 끝나면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가슴 벅차고 재미있었다.
‘대학교는 이렇게 단체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곳이구나. 진짜 신나는 곳이구나.’
그날 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래의 의미는 지금도 잘 모른다. 그저 밝고, 경쾌하고, 희망적이고, 시원하게 들리는 그 멜로디와 가사가 그때의 우리 청춘과 묘하게 닮아 있었을 뿐이다.
그 시절의 나와 우리가 그리워 지금도 <새물>을 종종 찾아 듣는다. 남편은 뭐 이런 노래를 듣느냐며 핀잔을 주지만, 노래를 틀면 나도 모르게 그 밤의 마을회관 평상으로 시간 여행을 한다. 쏟아질 듯 촘촘한 별들과, 적당히 메슥거리며 뱃속을 뜨겁게 만들던 막걸리의 취기,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선배들의 춤을 따라 하려던 서툰 새내기 시절의 나.
그날 밤 발견한 반딧불보다 우리가 더 빛나 보였다면, 그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싱그런 봄날의 따뜻한 햇살보다
뜨거운 태양 내리쬐는 거리를 벗 삼아
화창한 가을날 시원한 바람보다
시린 바람 몰아치는 언덕에 선 우리
사람이 더불어 사는 세상 포기할 수 없기에 부서지고 깨어져도 우린 두렵지 않아
한걸음 한 걸음씩 내딛는 우리의 힘찬 걸음이
아름다운 세상 만드는 한 줌 거름 되는걸
조금씩 조금씩 흘리는 우리의 땀방울이
더러운 세상 씻어내는 맑은 새물 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