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키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부모로서 좋은 선택을 한다는 것

by 도토리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이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요즘 이 구절만큼 내 마음을 깊게 건드리는 말이 또 있을까. 시 속 꽃처럼, 나도 계속 흔들리고 방황한다.
아홉 살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는 아이를 바라보다 문득,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하나둘 ‘학군지’로 떠나는 친구들을 바라보면 마치 모두가 미지의 우주 기지로 옮겨가는데, 홀로 지구에 남겨진 사람이 된 듯한 기분도 든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아주 작은 걱정에서 출발해 어느새 커다란 질문으로 번져갔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걸까.


사실 학군에 대한 고민은 1학년이 되자마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직장도 가까우니, ‘여기서 초중고를 편하게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장면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는 그림 그리고, 시 쓰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TV는 금요일 무비데이에만 켜는 집. 거실엔 각자의 독서대가 놓여 있고, 주말이면 박물관이나 공원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와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생활. 보드게임이나 바둑을 두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런 리듬이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간 순간, 아이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휴대폰, 유튜브 숏츠, 게임 이야기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우리 반에 휴대폰 나만 없어!”라는 억울함과 소외감. 그리고 그 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와의 끝없는 대립.

환경은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보다 빠르게 흔들어놓았다.
과한 폭력성을 보이는 아이들, 이유 없는 욕설, 1학년 교실답지 않게 맞고 때리는 일이 반복되며 학폭위가 열릴 뻔한 적도 있었다. 등굣길이 겹치는 중학생들이 내뱉는 너무 많은 욕설에 우리 아이는 스스로 학교 상담실에 찾아가, '언니들이 하는 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자꾸 화가 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욕을 하게 돼요' 라며 상담을 신청하는 사건까지 만들었다. 게다가 동네에 퍼지던 초등생 엄마와 중학생 아빠의 ‘너무 이른 스캔들’과, 중학생 엄마는 한 명인데 아빠 후보가 3명이라는 현대판 맘마미아 이야기까지.


내가 믿었던 '책과 사유의 세계'가, 아이들의 무책임한 욕설과 폭력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여러 상황이 예고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밀려왔고, 이건 단순히 ‘한두 명의 문제아’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고민하는 학군이 더 이상 ‘성적’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둘러싼 환경 전체’가 되어버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만 동시에, 우리는 현실이라는 큰 벽 앞에 있었다. 남편의 소득 구조와 대출 한도, 감당하기 어려운 집값의 무게.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상은 우리에게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생각한 사이, 우리가 주목하던 지역들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상승했다. 심한 곳은 6개월 만에 6억이 오른 곳도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뛰어오르는 시세를 보며 학군 고민은 어느새 ‘상급지로 가야 하나?’라는 전혀 다른 고민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한 고민이었는데, 어느새 ‘그때 샀어야 했는데’, ‘왜 우리는 결단력이 없지?’라는 서로에 대한 원망과 자책, 후회만 남았다. 아이보다 우리의 처지가 더 큰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마음을 더 뾰족하고 뒤틀리게 했다.


아이가 아홉 살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는 지금,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공부 잘하는 애는 어디서든 잘한다’는 말은 어쩌면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학군지에 간다고 일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욕하거나 방황하는 청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위 초식동물 같은 다수의 아이들, 높은 학업 성취도, 도보권의 학원, 안정된 분위기. 이 모든 것이 아이에게는 좋은 자극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장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군지의 밝은 면 뒤에는 아이 성향을 생각할 때 걱정스러운 그림자도 있다. 높은 경쟁, 과한 선행, 성과 중심의 문화. 평생 욕심 없이 ‘중간만 해도 충분하다’고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 너무 낯선 세계이기도 하다.


여기서 내 가장 깊은 흔들림이 생긴다. 나는 아이에게 더 좋은 기회를 주고 싶으면서도, 내가 오래도록 불편해했던 능력주의의 그림자를 아이에게까지 넘겨주고 싶지 않다.


비록 돈은 되지 않지만, 인문학을 공부한 엄마로서 내 아이만은 모순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정답을 빠르게 찾는 훈련'을 '삶' 전체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경쟁력이 되는 세상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능력과 성과만 있으면,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차별해도 좋다고 가르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관계라는 것이, 일렬로 줄세우듯 명쾌하게 서열매겨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고, '공정과 정의' 이라는 단어가 능력주의의 산물로 오용되어 사용되는 것에 의문을 가지며 자라기를 바랐다.


이 지점에서 나는 결국, 내가 어떤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하지만 안다. 이 고민은 ‘사회 구조의 비판’과 ‘부모로서의 책임’이 충돌할 때 누구나 겪는 흔들림이라는 것을. 나만의 모순이 아니라는 것도.


학군지로 이사 간 사람들은 말한다.


“분위기가 달라. 애들이 순해.”
“싸움을 해도 기말고사 끝나고 싸우는 게 여기 일진 스타일이야.”
“집값도 올랐어. 진작 올 걸.”

"학군지 애는 가출하면 피씨방 가서 찾으면 되지만, 비학군지 애는 가출하면 경찰서에 변호사 대동하고 가서 찾아야해."


그 말을 들을 때면 한편으로 솔깃해지고, 또 한편으로 묘하게 불편해진다.
현실적인 장점과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가 서로 밀치고 당기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진짜 바라는 건 아이가 흔들리지 않는 꽃이 되는 게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스스로 곧게 서는 힘을 갖는 것이다. 흔들리지만, 결국 다시 피어나는 힘. 그 과정에서 아이와 내가 함께 자라나는 일.

완벽한 학군이나 설계된 미래가 없어도, 아이가 자기 꽃을 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사실.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앞으로 우리 가족이 어떤 선택을 할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흔들림 자체가 우리 가족의 가장 의미 있는 성장의 과정임을 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와 내가 이 흔들림 속을 함께 지나며 스스로의 줄기를 곧게 세우는 힘을 갖는 것이다.



The Fairy Tale (circa 1845) James Sant (English, 1820–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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