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원을 등록하고 온 날
우리 딸, 안녕?
언젠가는 너에게 엄마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서툴지만 편지를 써 봐.
오늘이 네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영어학원의 첫날이었지? 어찌나 설레하던지, 팔랑팔랑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는 너를, 엄마는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어. 평소 같으면 "걸어야지!"라고 폭풍 잔소리를 했을 텐데, 그 말마저 잊고 그저 네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더라. 엄마한테 짧게 인사하고 낯선 학원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너를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우리가 함께 영어 공부를 했던 지난 20개월이 떠올랐어.
8살 4월 기억나? 우리 그때, 제일 친한 친구와 ORT 1단계 처음 시작하던 날 말이야. 'HOP! HOP! POP!'이라는 책이었는데, 지금이야 너무 쉬울 그 책이, 그때는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힘들게 입술을 떼다가 울어버린 네가 떠올라. 그걸 9단계까지 4번씩 낭독을 시키는 엄마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그저 재밌다며 잘 따라와 준 네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기특하고 대견해.
우리가 매일 함께 책을 읽으며 쌓아온 시간들이 아직도 엄마 마음속에는 선명하게 남아있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낭독하면서, 엄마는 동영상을 찍어주고 너는 그 영상을 보는 걸 좋아했잖아. 연예인 된 것 같다고, 선글라스도 쓰고, 의상도 골라 입고 연기도 하고 그랬지. 네가 매일 남긴 그 영상들이 벌써 600개가 쌓였더라. 언제 이렇게 너와의 시간이 쌓였는지, 깜짝 놀랐어.
처음에는 낭독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잖아. 발음 틀렸다고, 자꾸 실수한다고. 엄마가 아무리 괜찮다고 다독여줘도 너는 완벽하고 싶다며 다시 첫 페이지부터 읽었지. 어느 날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영상을 마치기도 하고, 거의 다 찍었는데 처음부터 다시 찍는다고 고집부리기도 했지.
돌아보면 우리 진짜 재밌는 책들 많이 읽었어. 네가 제일 좋아했던 <Elephant&Piggie> 책 기억나? 지금은 친구 동생에게 물려준 책이지만, 어찌나 좋아했던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침대에서 읽어달라고 엄마를 불렀었잖아.
네가 처음 <My Weird School>을 읽으면서 "엄마, 이거 완전 대박이야! 진짜 웃겨! 엄마도 읽어봐!" 라며, 엄마한테 가져와 읽어줄 때 엄마는 사실 표현하지 않았지만 가슴에 울컥하는 감정이 있었어. 처음으로 네가 두꺼운 챕터북을 읽는 날이었는데, 너는 글밥이 늘어난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 시리즈에 푹 빠지게 되었지. 사실 비밀인데, 그날 네가 그 책을 낭독한 영상을 엄마는 열 번도 넘게 다시 봤어. 그리고 창피한 일인데, 조금 울었다? 엄마는 원래 울보라서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하지 마.
학원에 가서, 친구들처럼 영어로 글도 써 보고, 원어민이랑 이야기도 하고 싶다는 너에게 "글 쓰는 건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라고 해버린 엄마가 밉기도 했지?
사실 엄마도 알고 있었어. 영어로 글도 쓰고 싶고, 스펠링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속상해했던 거. 단어를 외운 적도, 리딩 문제집을 풀어본 적도 없는 너에게 그런 갈증은 자연스러운 거고, 엄마가 그 갈증을 다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에 스스로 조금 속상했던 것 같아. 엄마도 나름 해보려고 했는데, 너에게는 부족했었나, 싶어서 괜히 서운하기도 했지.
오늘 네가 학원에서 받아온 첫 북리포트를 보면서, 엄마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어. 글은 서툴렀지만, 스펠링도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안에는 너의 신남과 호기심이 그대로 담겨 있었거든. 그리고 선생님이 써주신 피드백을 보며 깨달았어. ‘아, 내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었구나.’, '이제는 학원에 보낼 때가 됐구나.' 그리고, 엄마가 영어를 핑계로 ‘조금 더 너랑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구나', 싶더라.
학교에 입학하고, 셋째 날부터인가, 이제 엄마 안 따라와도 된다고 했잖아. 친구랑 손잡고 가는 게 더 좋다고. 그리고 놀이터에서 친구들끼리 놀고 집에 잘 들어갈 테니까, 엄마는 이제 벤치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지. 그런 숱하게 많은 너의 독립적인 날들에 엄마는 묘한 감정을 느꼈어.
아마 너보다 엄마가 너한테 더 기대고 있었던 것 같아. 작은 너에게, 조금 더 같이 있고, 머무르고 싶었나 봐.
그럼에도, 엄마는 안도하고 뿌듯하고, 또 기특해. 너는 스스로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어 하니까. 그게 엄마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하는지 몰라.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창밖에 날아가는 두 마리의 새를 바라보며 엄마는 생각해.
너와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는 없다는 걸,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성장이라는 걸.
우리 함께했던 엄마표 영어의 20개월은 이렇게 마무리하지만, 우리 이거 끝 아니고 새로운 시작인 거 알지? 시즌1이 마무리된 거고, 이제 시즌2가 시작되는 거야. 너의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 엄마는 열심히 또 원서를 빌려다 주고 네가 재밌어할 만한 영상을 찾아놓을게. 너는 지금처럼 학교 도서관에서 원서를 빌려오고, 그저 매일 재미있게 읽어주면 돼.
우리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그렇지?
이제 엄마는 조금씩 너의 걸음을 따라가며 보폭을 늦춰 바라볼 거야. 네가 스스로 앞서 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할 거야. 엄마가 함께 걷지 않는다고 속상해하지 마. 엄마는 언제나 네 뒤에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너의 십 대를 기다리며, 엄마도 조금씩 홀로 설 준비를 할게. 너에게 기대기에는, 엄마는 너무 무겁고 커다라니까. 이제 너는 자신 있게 네 길을 걸어가. 그리고 그저 행복하기만 해 줘. 언제든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때는 그저 뒤만 돌아봐. 엄마가 서 있으니까.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간 순간들은 엄마 마음에 담아둘게. 그리고 너도 엄마도, 우리 앞으로도 더 쑥쑥 자라자.
그동안 애썼고, 고마웠어. 나의 작은 아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