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기를

틀려도 괜찮아

by 도토리


아이가 자신의 실수에 이상하리만큼 관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 자각한 순간부터, 나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실수·불안·걱정에 관한 동화책을 무더기로 집어 들었다.

아름다운 실수, 걱정 세탁소, 틀려도 괜찮아, 걱정 덜어내는 책…등등.
책 속 주인공들이 자신의 불안과 실수를 직면하고, 흔들리고, 그러다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을 보며 아이도 무언가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육아라는 것이, 아이의 기질이라는 것이, 어디 붕어빵 만들듯 그렇게 간단했던가. 인간의 결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타고난 백수의 기질을 가진 내가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자! 나도 이제 이 책의 저자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시작해 볼까!?”라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타고난 기질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깊은 것이라, 제 아무리 부모라 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 하나도 바꾸지 못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는 존재와 이리도 오래 한 몸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타고난 아이의 기질을 내가 감히 ‘고쳐보겠다’니. 이제와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설프고 서툴렀던 시도였음에 틀림없다.


오늘 아침, 아이는 결국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손을 흔들었지만, 아이의 손바닥은 연신 눈물을 훔치느라 바빴고,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낸 두 눈가에는 벌겋게 생채기가 났다.


“이따 학교 정문으로 태우러 갈게!”

닫히는 문을 향해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공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걸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다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창문 앞으로 달려갔다. 신호등을 건너고, 친구를 만나고, 저 멀리 사라지기까지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언젠가 한 번쯤은 집을 올려다볼까? 그러면 나는 환하게 손을 흔들어줄 텐데. 물론 아이는 30층 가까운 하늘 위에서 엄마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걸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건의 발단은 아침 식탁이었다. 영어학원 첫 숙제. 매주 단어 25개를 외워서 시험을 본다는 첫 숙제가 시발점이었다. 원서만 읽는 방법으로 영어를 배웠기에, 파닉스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단어를 외운다’는 건 생전 처음 겪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이는 어젯밤, 결연한 얼굴로 화장실, 복도, 독서대, 전등 밑에 포스트잇을 잔뜩 붙였다. 단어와 예문을 적고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 독서시간에도 책 대신 단어장을 꺼내 들었다. 나는 사과 조각을 하나씩 입에 넣어주며, 마치 수험생 엄마가 된 기분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제 다 외웠어. 문제 내줘!”


나는 식탁 모서리에 놓인 가득찬 물컵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우리 쓰는 건 아직 하지 말고, 소리로 대답하면서 외우는 거 먼저 해 보자.' 라며 완곡한 거절의 뜻을 내비쳤지만, 아이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완강했다.
그리고… 영어 단어 neighbor에서 아이는 완전히 무너졌다. 발음을 다시 알려줘도, 나누어 외우게 해도, g와 h의 조합이 아이의 뇌 회로를 뚝 끊어버린 것 같았다. 이후 아이는 줄줄이 틀렸고, 곧 울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그 순간 아이보다 내가 더 울고싶었다.

틀릴 수 있는 건데. 아직은 실수하며 익숙해지는 단계인데. 뭘 얼마나 했다고 저렇게 서럽게 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실수’ 그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자신을 한심하다 느꼈는지 스스로 머리를 치고 손등을 긁으며 자해하듯 괴로워했다. 손등에 피가 나기 시작했고, 나는 급하게 아이의 손을 막으며 소리쳤으며, 우리 두 사람 모두 상처받은 아침이었다.


아이의 어깨는 생각보다 무겁다. 스스로를 재촉하는 마음, 더 잘하고 싶은 욕망,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러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하루를 버텨낸다.


작년, 영화관에서 아이와 함께 본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불안이’ 캐릭터가 나올 때,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불안이의 모든 행동이 우리 아이의 거울 같았기 때문이다. '난 그저 라일리를 지키려 했을 뿐이었는데.'라는 대사 속에서, 아이의 마음속 외침을 들었다. 잘하고 싶은 간절함이 곧 자기 비난으로 바뀌는 그 고통을.

미안해. 이렇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
난 그저 라일리를 지키려 했을 뿐이었는데.


아이 마음속엔 늘 이런 말들이 맴돈다.


“실수하면 안 돼.”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안 돼.” “완벽해야 가치 있어.”


그런 아이에게 나는 숱하게도 많이 “그렇게 울고불고할 거면 그만해! 그냥 하지 마!”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참 못났던 시절이었다. 사실 아이가 원한 건 단 하나였는데. “잘하고 싶어서 더 속상한 거구나.” 그 문장. 한 문장으로 충분했는데, 아이의 불안을 나의 불안이라는 더 큰 덩어리로 뭉개버렸다. 저렇게 크면 안될텐데, 라는 나의 불안이 아이의 불안을 가볍게 물리쳤다.


아이에게 완벽함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패’ 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안다. 나 스스로가 아이의 결과가 아닌 과정을 칭찬해 왔다고 자부할 수도 없고, 숱하게 많은 날들 동안 아이의 기질과 상반되는 육아의 흐름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아이는 자신이 틀리지 않으면 부모에게 비난받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치는 분명하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우리는 실수하고, 넘어지고, 울고, 다시 일어서면서 자란다는 것.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완벽주의는 실패하지 않게 너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의 성장을 막고 있는다는 것. 실수는 우리를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반면, 완벽주의는 스스로를 소진시킨다는 것.

너를 가장 힘들고 괴롭게 하는 건 다름 아닌 너의 그 마음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아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문장들이 문득 떠올랐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데미안에서 느꼈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는 용기'를 바라보며, 엄마인 나는 그저 아이가 스스로의 알을 깨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서 표현하는 ‘알을 깨고 나오는 일’은 결국 스스로의 몫이다. 부모는 그저 줄탁동시의 어미닭처럼, 아이가 두드릴 때 그 옆에서 가볍게 두드려줄 뿐이다. 아이가 완벽주의라는 단단한 껍질 안에서 괴로워할지라도, 그 알을 부모가 몽땅 ‘깨줄’ 수는 없다. 부모로서 아이의 발전을 위하여 조력하지만, 결정적인 균열은 반드시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어느 날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놓쳐, 학원 시간에 늦을까 봐 종종거리는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만 노력하면 돼. 내가 바꿀 수 없는 건 그냥 흘러가가게 둬. 스트레스받지 마."


라고. 나는 그때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놀라움과 충격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의 기질상 전혀 하지 않았을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편안함을 원하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그리하여 자신이 노력하여 바꿀 수 있는 부분을 바꾸려, 불안이라는 바다에서 부던히도 헤엄을 치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누구보다도 스스로 고단함을 느끼고 편안함에 이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지금은 힘들고 억울하고 눈물이 나도,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조용한 변곡점이 생겨나고 있다. 알이 흔들리고, 금이 가고, 언젠가는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올 것이다. 성장은 늘 조용하지만 분명하다.

실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아이는 어떤 어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의 알을 대신 깨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본인의 때를 찾을 때까지 적당히 두드려주는 사람이다. 아이가 완벽주의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서 고통받을지라도, 나는 그 알을 대신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이가 준비되는 순간, 알에서 스스로 나오는 그 장엄한 장면을 기다릴 것이다. 흔들리는 아이 곁에서, 나는 조용히, 따뜻하게 껍질 위에 귀를 대고 아이의 마음을 들어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이의 성장을 위해 지킬 수 있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랑의 무게일 것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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