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비투스
기억과 삶, 문화와 경험은 우리 안에 전승된다. 그것은 우리가 피하거나 외면하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사는 방식, 내가 선택하는 기준,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은 결국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세계의 구조와 깊이 닮아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마흔이 다 되어가도록 스키장에 가본 적이 없다. 호텔 뷔페나, 유명한 뮤지컬, 고급 커피 전문점의 메뉴판 같은 것들은 여전히 낯설다. 누군가 “별다방에서 뭐 마실래?”라고 물을 때, 나는 어른인데도 한순간에 십 대처럼 주눅이 오른다. 손끝이 먼저 움츠러들고, 마음이 그 뒤를 따른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자고 했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그런 곳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파스타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던 나에게,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되어있는 메뉴판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친구들에게 메뉴판을 건넨 후 웃어넘기며, ‘나는 다 좋아. 너희들 먹고싶은걸로 주문하자!’밖에 말할 수 없던 남모를 나의 수치가 여전히 목 뒤편에 남아있다. 외식이라고는 늘 뿌연 담배연기, 뒹구는 소주병이 뒹구는 식당에서 먹었던 국밥이나 머릿고기, 추어탕 뿐이었다. 그곳은 불안했지만, 적어도 내가 앉아야 할 자리와 젓가락을 들어야 할 순서는 알고 있는 나의 세계였다. 그러나 고급스러운 가죽 메뉴판은 모르는 세계와 마주 선 데서 오는 압도감으로 다가왔다.
그 감각은 어른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여전히 그 세계의 문법을 모른다. ‘그깟 주문 하나 못 해서’라기 보다는,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세계에서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경험이 여전히 서툴기 때문이다.
이름도 어려운 음식들은 대부분 먹어본 적도 없고, 그저 동네 식자재마트나 재래시장이 마음이 편하고 익숙하다. 창고형 대형마트의 서양식 식재료 코너 앞에서는 그저 발걸음을 멈춘채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한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과 나의 아비투스는 다르니까.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선에서 몸은 쉽게 움직여주지 않는다. 시선만 떠돌고, 마음은 제자리에서 흔들린다.
집 꾸미기 문화도 마찬가지다. SNS 속 정갈한 집들. 가구와 색감과 질감이 완벽히 맞춰진 집들. 그런 곳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집이란 원래 저런 것’이 자연스러운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런 집은 현실이라기보다 전시된 이상향처럼 보인다. 감탄하되, 욕망하지 않는다. 몸이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는 욕망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대접해야 하는지, 어떤 분위기로 맞아야 하는지, 기본적인 규칙 같은 것이 내겐 없다.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문화는, 어른이 되어도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되어서야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 봤고, 여권도 신혼여행을 위해 만들었다.
대학생 때 왜 배낭여행이라도 떠나지 않았느냐고? 그 흔한 워킹홀리데이도 떠나지 않았냐 물으면, 글쎄. 그 시절에는 늘 알바를 했었다고 해야하는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대범한 성격을 가지지 못했다고 대답해야하나. 그저 공항에 가는 것이 왠지 주눅이 좀 들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으려나.
몸이 기억하는 세계는 이토록 완고하다. ‘세포가 기억하는 가난’이라는 말은 그저 문학적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내 선택의 방식, 내 두려움의 모양, 내가 스스로에게 그어버린 보이지 않는 울타리의 실체다.
식재료 코너 앞에서조차, 나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다시 깨닫는다. 사람들은 생소한 이름의 치즈들을 자연스레 카트에 담는다. 나는 이리저리 둘어보며 주저하다가 결국 익숙한 것들을 손에 잡아들고 낯선 세계에서 서둘러 빠져나온다.
외식 메뉴도 늘 한정적이다. 나는 아이를 다양한 새로운 경험 속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부모가 되지 못했다. 아이에게 새로운 맛을 경험시켜주지 못한 건 아이 탓이 아니라 내 경험의 빈약함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지금도 뼈아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모가 가진 문화적·경제적 자본은 아이의 세계를 형성한다. 아이는 부모가 아는 만큼의 세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내가 갖지 못한 세계가 아이의 가능성을 좁힐까 봐. 나의 낯섦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아이에게도 전승될까 봐.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불행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가진 세계의 폭이 때때로 부끄럽고, 쓸쓸할 뿐이다. 나는 좁은 세계에서 오래 살아왔고, 그 좁음이 방패가 되어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세계가 세상으로 향하는 아이를 가로막는 벽이 되지는 않을까 두렵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승되는 것은 비단 경험 그 자체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세계 앞에서의 태도 또한 전승된다.
아이가 “엄마, 이건 뭐야?”라고 물을 때, 내가 “나도 몰라. 근데 우리 같이 먹어볼까?”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한 문장이 세계를 조금 넓히지 않을까. 아이는 내가 시도하고, 부딪히며, 도망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태도를 배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익숙한 식재료만 손에 들고 마트를 나서지만, 언젠가는 아이와 낯선 음식을 함께 맛보고, 처음 보는 세상을 함께 걸을 것이다. 몸의 기억은 완강하지만, 그 기억도 천천히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갖지 못한 세계를 아이에게 억지로 쥐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조차 낯선 그 세계를 향해 아이와 함께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아이에게 화려한 세계를 물려주고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멈춰 서던 자리에서 아이는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처럼 낯선 것을 보고 겁먹고, 주저하고, 부끄러워하며 자라기보다, "나 이거 안 먹어봤어! 나 여기 처음 와 봤어! 근데 정말 맛있다! 진짜 재밌다!" 하며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자신의 외연과 내연 모두 넓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대를 끊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앞서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 걷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짜의 전승일 것이다.
* Habitus (아비투스)
개인이 성장 과정에서 속한 사회 계층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적인 사고방식, 행동 양식, 취향, 감각 등을 총칭한다. 개인의 취향은 배경과 환경, 가치관, 분위기, 종교, 사상, 권력이나 계층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혹은 그런 것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만든 단어. 습관을 의미하는 habit과 같은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아비투스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고 짧게는 20~30년, 길게는 수세대간 내려온 경험과 문화가 축적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바꾸거나 극복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