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성과 상대성의 실마리
❶우월성 실마리
①우월성의 뜻
제시 본성은 모든 생물의 본성으로 생명체에 보편적이어서 다른 생물들에도 그러함을 의심하지 않지만, 평가를 통해서 우열 가운데 우월함만을 추구하려는 점은 다른 생물에게는 아직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는데 견주어 인간에게는 매우 뚜렷하게 작동한다. 제시는 주관적 자존심에 의하는 것이 아닌 한 늘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드러내 보이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제시가 생물의 근원적인 의지이기는 하지만 제시의 행동 내용에는 먼저 일정한 조건 2가지가 전제되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사회적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는 생명체, 특히 인간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드러내 보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에 맞춰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를 ”남보다 더 낫게“, 곧 남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월하게 드러내 보이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는 증표인 이름을 통해 더 나은, 곧 더 우월한 존재로 드러내 보이{자기 제시}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존재이다. 제시 본성이 지닌 이러한 조건적 제시의 특성을 [우월성(優越性: 낫고 못함 가운데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부르며 이는 제시 본성의 첫 번째 조건이다.
인간에게〘우월성〙이 있다는 사실은 예리한 인성론자였던 [A·아들러]가 이미 지적했음을 안다. 아들러가 인간의 우월성을 심성의 중심 개념으로 삼은 것은 그의 사상이 여러 번 변전한 뒤인 만년에 이르러서였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아들러 최초의 주장은 인간이 심적ㆍ신체적, 특히 신체에서의 기관(器官)의 열등감을 보상(補償)하려는 마음에 의해서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궁극적인 동기가 다만 열등감의 보상이라는 소극적인 의도에 의해서만 유래하는 것일까? 아들러는 열등감의 보상이 필요한 적극적인 이유에 관한 의문을 보완하기 위해 그의 생각을 수정하여, 열등감을 보상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인생행로에 나타나는 어떤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강한 공격성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장애물의 극복 역시 모종의 적극적인 목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으로 보인다. 이를 인식했음인지 그는 공격적 충동으로 보았던 그의 인성 개념을 [힘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라는 개념으로 바꿨다. 이러한 변전 끝에 도달한 최후의 개념이 바로 [우월에 대한 추구(strung for superiority)]였다. 그는 인생은 [우월에 대한 추구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모든 사람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아래에서 위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위대한 향상의 욕구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오로지 신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점만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필자가 지금까지 계속 [제시 본성]이라는 낱말로 표기해 온 우리의 주제는 처음에 밝혀 두었던 바와 같이 [자기를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드러내 보임(자기 제시)]이라는 명제를 줄인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삶이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 단적으로 가치 지향적이라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이미 인간은 “신체적인 생존을 넘어서 사는 존재”임이 드러난다.
①긍정적 평가인 [우월함]과 부정적 평가인 [열등함]
그런데 제시에는 늘 상찬만이 따르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제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제시의 조건으로서의 우월성은 불가피하게 긍정적 방향인 [우월]과 부정적 방향인 [열등]으로 나뉜다. [명예]란 행동이나 태도, 의지나 업적, 능력이나 결과 등이 우월하여 세인으로부터 상찬을 받음을 의미한다.
드러낼 때에 제시의 내용이 열등하여 세인들로부터 상찬 대신 경멸이나 조소를 받게 되는 부정적 상황도 얼마든지 보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통틀어 [치욕(恥辱)]이라고 부른다. 곧 이름이 드러남{명성}에는 훌륭한 이름으로 드러나는 [(위명:偉名)]인 명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치욕에 따르는 이름인 더러운 이름[오명(汚名)]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처럼 명성은 세상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인간이 자기를 제시하려 할 때 영욕(榮辱)을 불문하고 오직 드러내 보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움을 불러올 열등한 제시는 결코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피하려 할 뿐만 아니라 [은폐], 곧 감추려 들기까지 하며 오직 명예로운 경우에 한해 제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인간은 명예심에 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데 그 까닭은 명예심이 인간 본성인 자기 제시의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제시 본성에 우월성이 더해진 적극적 측면을 자랑{과시(誇示)}이라 하고 자랑하는 것을 뽐낸다고 한다. 이에 반(反)해 자기의 열등함을 덮어 감추려 하는 소극적 측면을 덮어 감춤{은폐(隱蔽:)}이라고 한다. 우월성에서 제시자는 자기의 우월한 내용은 드러내어 과시(뽐내려)하려 하는 반면에 열등한 내용은 그것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제시 본성에 역효과 적이기 때문에 덮어 감추[숨기]려고 애쓴다.
인간이 명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이름이 단순하게 사해(四海)에 널리 알려진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하게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와 반대로 열등하게 드러난다면, 곧 열등한 이름이 널리 퍼진다면 그의 제시 본성은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치욕감이란 바로 이러한 열등한 내용의 이름, 즉 불명예스러운 현상에 관한 당사자의 감정이다.
명성의 조건을 채우지 못해 남들로부터 받는 반대 현상으로 열등하다는 [부정적 평가]에 따라 느끼게 되는 치욕(恥辱)으로. 굴욕[불명예]과 모욕(侮辱)ㆍ 수모(受侮) 등의 감정 및 무시와 따돌림{왕따}ㆍ망각 등이 있다.
우월한 내용은 뽐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열등한 내용은 그것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제시 본성에 역효과 적이기 때문에 덮어 감추{숨기}려고 애쓴다.
그래서 새로 맞춘 최신 모드의 의상을 차려입고 그에 어울리는 구두와 핸드백을 든 뒤 그 매력적인 모습을 한껏 과시하려고 나들이하던 아가씨라 하더라도 명동(明洞) 입구에 들어서다가 갑자기 미끄러져 옷이 그만 흙투성이가 되어버린다면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황급히 어디로인지 숨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 특히 윗사람 ―주로 임금{왕}― 의 약점으로서 이를 초들면 사형으로 다스림을 받을 정도의 격노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치명적인 열등한 용재와 용질들이 있다.
이를 [역린(逆鱗)]이라고 한다. ◉❰한비자❱〈세난편(說難編)〉에 의하면
“미르{용(龍)}는, 길들이면 타고 다닐 수 있는 매우 유순한 동물이지만 미르의 목 아래에는 지름이 한 자나 되는 거꾸로 난 비늘, 곧 [역린(逆鱗)]이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아무리 친하더라도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이고 만다.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이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자가 능히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 설득을 기대할 만하다.”
왜 미르는 역린을 건드리면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죽여 버리는가? 왜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그런 역린이 있는가? 역린이 왕을 비롯한 윗사람에게만 격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치명적인 열등한〘용재〙와〘용질〙은 누구에게나 있고 자기 제시의 우월성에 따라 오명의 수모(受侮: 모욕(侮辱)을 비롯한 모든 굴욕[屈辱; 불명예]과 치욕(恥辱))을 싫어하는 모든 사람은 그의 역린을 자극하면 격노하게 된다.
사람들이 열등 평가보다 더 두려워 하는 것은 알아주지 않거나, 잊히는 것, 특히 지인들에게 잊혀지는 일이다.
상대성이란 드러내 보임이 자기의 우열이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점을 가리킨다.
제시의 내용은 [낫다(우優)]거나 못하다[열(劣)]라는 비교의 개념으로 평가된다. 모든 사물은 늘 [낫다(우:優)]거나 못하다[열:劣)]라는 개념에 따라서만 평가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우열의 평가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판정되는 것일까?
우리는 가치와 의미의 근거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유의해야 하겠지만, 먼저 비교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평가, 곧 우열의 값을 매기기 위해서는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지닌 제시 내용을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서 평가한다면 그것이 우월하든 열등하든 간에 그 내용이 같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똑같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곧 제시의 비교 척도를 궁극적으로는 이념이나 이상적 가치관에 따라 이른바〘진 • 선 • 미〙를 기준으로 하는 절대적인 가치 개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시 본성의 우열 평가에는 우선적인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절대적인 기준의 설정이 쉽지도 않겠지만 그러한 기준의 사용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것이 제시 본성이다.
현실에서 일차적인 “평가 기준은 주변에 같이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 따라서 매겨진다.” [우(優)]는 다른 대상과 비교해서 가치나 의미가 더 나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수한 것은 [낫다]라고 말하며 그런 사람을 나은 이, 곧 [나은 이], 또는 잘난 이라 부르고 [열(劣)], 곧 그보다 가치나 의미가 낮음, 곧 열등한 것을 가리켜서 [못하다]라고 말하며 그런 사람을 [못한 이], 곧 못한 사람(못난 이)이라 부른다.
이처럼 제시의 우열은 일차적으로는 바로 제시자와 똑같은 존재인 다른 제시자들과의 비교에 따른 견줌을 통한 “상대적인 평가”로 매겨진다, 이것이 필자가 [상대성(相對性)]이라고 부르는 제시의 2번째 조건이다.
그렇기에 늘 똑같은 걸리버의 체격이 소인국에서는 거인으로 여겨지지만, 대인국에서는 소인으로 취급되듯이 비교되는 상대방의 값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이처럼 제시 본성은 서로 사이의 비교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경쟁이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열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시 2가지의 근거가 필요하다. [첫째]는 제시의 우 • 열 평가자의 심성에 맞는 일차적인 판정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두번째]의 근거는 견줌의 범위, 곧 [테두리 안에서의 비교]라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의 마구잡이식 우열 비교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일정한 범위, 곧 필자가 [마당(장: 場)]이라고 부르는 테두리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열의 비교 평가는 일정한 마당 안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의 비교에 따라서 평가된다는 뜻이다.
우열은, 제시의 주체와 같은 수준의 객체인 대상으로 필자가〘맞잡이〙{적수(敵手)}라고 부르는 비교 주체에 관한 우열의 격(格)이 같은 동격자[同格者{품격이 같은 사람} 또는 지위가 같은 동위자[同位者{지위나 수준이 샅은 사람들} 등 본래부터 세(勢) 또는 수준이 같거나 비슷함이 인정되는, 그래서 서로 어울리는 무리들인 비교의 대상들과 비교하여 판정한다.
맞잡이는 매우 많다. 그래서 모든 맞잡이들과의 마당에서의 비교에는 특히 시공간의 일치가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지 않는 맞잡이와의 비교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다. 제시의 상대성이란 이처럼 드러내 보임의 우열을 마당 안의 맞잡이와 견주어서 상대적으로 평가하려는 심적 경향성이다. 강이와 낭이가 맞잡이일 때 강이가 나은 ⸺곧 우월한⸺ 자라면 낭이는 강이에 견주어 못난, 곧 낫지 못한 ⸺열등한⸺ 자로 평가된다. 실력이 막상막하인 맞잡이를 우리는 [라이벌]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