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무경 Apr 17. 2024

로마의 건국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마 건국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https://blog.naver.com/yejihanja/20184119715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2세기 초엽에 유럽의 대부분과 아프리카의 북부, 서남아시아 일대를 모두 영토로 삼아 지중해를 자기들의 호수라고 부르던 대제국 로마는 서양의 중심으로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 대제국의 시초는 우리 서울시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도시국가에서 출발했다.  


처음에 조그마하던 이 로마가 세계적인 제국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지금은 다시금 이탈리아의 수도의 이름으로 작아졌는데 이 자리에 맨 처음 나라가 세워진 것은 BC 약 600~700년의 일이었다.


여기에 최초로 나라를 세운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은 다 같이 라틴인들로서 이들은 BC 약 1000년경에 이탈리아의 북쪽으로부터 이곳에 내려와 라티움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그 북쪽에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로마의 건국에 관한 신화(神話)가 있는데 이 신화는 이들이 어울려 살면서 또한 서로 다툰 이야기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로이가 그리스 군에게 함락 당하자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스아스는 여러 척의 배에 부족들을 나눠 태우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에게 해를 지나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서 잠시 머문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라티움에 상륙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머물러 살게 되었다.


아이네스아스로부터 16대 째의 왕인 누미토르의 동생 아물리우스는 형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인 공주(公主)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여신(女神)의 무녀(巫女)로 만들었다.


베스타의 무녀가 되면 일평생 결혼할 수가 없는데 그래야만 혹시 자기의 왕위를 빼앗을지도 모를 형의 자녀(손자·손녀)가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군신(軍神) 마르스(아레스)가, 제사지낼 물을 뜨려고 숲 속의 샘으로 가던 실비아를 범하여 임신을 시켰기 때문이다.


아물리우스는 실비아를 살해해 버리고 그녀가 낳은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바구니에 넣어 티베르강에 내다 버렸다.


그러나 갑자기 강물이 불어 역류(逆流)하더니 바구니는 상류 지방인 루페르칼리스의 동굴에 닿았다. 이 쌍둥이들은 그 동굴에 살던 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다가 파우스툴루스라는 양치기에게 발견되어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인 아가 라레티아에게 양육되었다.


자라서 목동이 된 그들은 양부모에게서 그들이 누미토르의 외손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친구들과 함께 아물리우스를 찾아가 죽이고 외조부의 왕위도 찾아준 뒤에 로마 땅에 와서 도시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런데 레무스가 차지한 아벤티누스 언덕보다 자기가 차지한 파라티누스 언덕에 두 배나 많은 12마리의 새매가 날아가는 것을 본 로물루스는 이를 좋은 징조로 여겨 두 언덕 사이에 이랑을 파고 이를 경계로 성벽을 쌓으려 했다.


이를 본 레무스는 형을 놀리면서 경계를 뛰어 넘어왔고 격분한 로물루스는 그만 칼로 동생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곧 이를 후회하여 동생의 시신을 아벤티누스 언덕에 정중히 묻어주었다.


그 후 도시는 건설했으나 주민이 적은 것이 걱정이 된 로물루스는 카피톨리움 언덕에 난민 수용소를 짓고 망명자·범죄자·도망 온 노예 등을 모아 시의 인구를 늘렸다.


그러나 이들에게 시집오는 처녀들이 없는 것이 또 문제였다. 로물루스는 8월 21일에 열리는 콘수스 신의 축제일의 경기 대회에 이웃 사비니족을 초청해 놓고 그때 따라 온 사비니족 처녀들을 납치했다.


이 때문에 로마인과 사비니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로마는 사비니왕 티투스타티우스에게 카피톨리움 성을 빼앗기는 등 멸망 직전이었다.


다행히 야누스 신이 뜨거운 샘물을 뿜어 사비니 군을 막

아 주고 로물루스의 기도를 들은 유피테르(제우스) 신이 응원해 준 덕택으로 겨우 사태가 호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납치되어온 사비니의 처녀들이 나서서 양편을 화해시킨 덕분에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왕은 서로 화해하여 합동으로 로마를 통치하기로 약속했다.


그 후 로물루스는 먼저 사망한 타티우스를 대신하여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두 부족을 도맡아 33년간 통치했다.


그러다가 그가 54세 되던 해 7월 노나이 축제일에 군대 열병식을 사열하다가 별안간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로물루스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은 BC 6세기경까지 240여 년간 왕정을 이어왔으나 그 후에는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그들 중에서 선출된 2명의 콘술(집정관)을 두어 공화정치를 펴서 아우구스트스가 황제위(皇帝位)에 올라 황제제(皇帝制)가 시행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의 국운은 그 뒤로도 계속 융성해 내려오다가 395년에 동ㆍ서 로마로 분리되었다.  

      

[출처] 로마의 건국 |작성자 예지한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