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 박명의 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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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 재위: BC 49~33)의 후궁. 이름은 장(嫱ㆍ檣ㆍ牆). 자는 소군(昭君)
어릴 때의 이름은 호월(皓月).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은 자라고 한다.
진(晉)나라 때에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같아 피휘(避諱)하기 위해 왕명군(王明君), 또는 명비(明妃)라고 불렀다.
월(越)나라의 서시(西施),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가상의 여인 초선(貂嬋), 당나라 현종의 총비인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여인이라 불린다.
남군(南郡) 자귀(秭歸, 지금의 호북성 자귀) 출신의 양가집(일설에 제(齊)나라 사람 왕양(王襄)) 딸이었는데 그녀가 18세 되던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 38경)의 후궁 모집에 선발된 수 천명 중의 한 사람으로 입궁했다고 한다.
진(晉)나라 때의 도사(道士)인 갈홍(葛洪)이 전한(前漢) 시대의 잡사(雜事)를 기록한 저서《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시 황제는 후궁들을 일일이 접견할 수 없었으므로 화공(畵工)인 모연수(毛延壽)에게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해서 그 초상화를 보고 후궁을 물색하여 총애했다.
그러자 유력한 신분이나 후원자가 있는 후궁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초상화를 제작해 달라고 청탁했으나 집안이 넉넉하지 않은데다가 자신의 참된 용모를 과장하여 황제를 속이려는 마음이 없었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모연수는 그
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까지 하나 찍어놓았다.
이처럼 볼품없는 왕소군의 초상이 황제의 눈에 뜨일 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를 상면해 보지도 못한 채 궁녀의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동생인 호한야(呼韓邪)선우(單于: 흉노의 왕)와 대립하여 다투던 질지(郅支)선우가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에게 패해 잡혀 죽자 호한야가 한에 투항하면서 신하를 자청, 많은 공물을 바치면서 내조(來朝)했다.
이 때 호한야가 한나라의 공주를 얻어 천자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원했다.
한나라에서는 자주 내침하는 흉노(匈奴)를 무마하기 위해 한나라 공주들을 선우와 정략결혼 시키는 일이 있었으므로 황제는 이를 수락하고 궁녀 5명을 하사하기로 약속했다.
호한야가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했으므로 한나라에서는 시집보낼 공주를 물색하는 한편 황제에게 선택받지 못한 후궁들을 동원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왕소군을 본 호한야가 공주가 아닌 궁녀라도 괜찮다고 제의하자 황제는 즉석에서 그 선우에게 궁녀의 선택권을 부여해 왕소군이 선택되고 그녀는 흉노의 선우에게 보내지기로 결정되었다.
원제는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때에야 그녀가 단아한 태도의 절세 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크게 후회했으나 이미 수락해버린 일이어서 돌이킬 수 없었다.
이후의 조사에서 뇌물에 의해 화공 모연수가 초상화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에 격노한 원제는 그를 참형(斬刑)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궁으로 들어와 수년이 지났음에도 황제를 알현조차 못하여 비관하던 왕소군이 자청하여 흉노 행을 택했다는 설도 있다.
BC 33년 호한야(呼韓邪)에게 시집가는 그녀에게 황제는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녀는 흉노로 건너가 영호(寧胡) 연씨(閼氏: 연씨는 선우의 왕비를 가리킴)라고 불렸으며, 2년 후인 한나라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 이도아사(伊屠牙斯; 또는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은 뒤에 흉노의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후한과의 관계가 악화되던 흉노는 장군 두헌(竇憲)이 추격해 오자 모두 서쪽으로 달아났으며 계속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어 유럽 흑해 연안으로 들어갔는데 동 고트(Goths)족 국가를 점령, 멸망시킨 훈족이 바로 일축왕 계열의 흉노족이라는 설이 있다.
호한야는 그때 이미 노쇠하여 왕소군과 결혼한지 3년 만인 BC 31년에 죽었다.
그래서 왕위는 호한야 본처의 아들인 약제선우(若鞮單于: 이름은 조도막고(雕陶莫皋) 또는 복주루(復株累))가 계승하게 되고 왕소군은 흉노의 풍습에 따라 약제선우에게 재가했다.
선우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면서 11년을 살다가 그녀의 나이 32세 때 죽음으로 사별했다.
그들 사이에 운(雲)과 당(當)이라는 딸 둘이 태어났으며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이후 그녀는 한나라와 흉노 사이의 화친을 위해 활약했는데 그 성과가 적지 않았다.
왕소군의 형제는 후작(侯爵)에 봉해지고, 그 후 여러 차례 칙명을 받들어 흉노의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이때 왕소군을 만나기도 했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원제의 황후인 태황태후(太皇太后)를 모신 적이 있다.왕망이 한(漢)나라의 정권을 탈취하여 신(新)나라를 세우자 흉노 선우는 유씨가 아닌 왕망을 한나라의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고 여겨 한나라의 변경을 자주 침범했으므로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왕소군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화친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이러한 슬픈 상황으로 인해 가슴의 응어리를 안고 절망 중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유해는 다헤이 허[大黑河: 대흑하. 현재의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고] 주도(主都) 후허하오터[呼和浩特: 호화호특] 시 구성(旧城) 남쪽 9km)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지금도 그녀의 묘소가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무덤을 〘청총(靑冢)〙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 다른 설에는 재혼을 거절하고 독약을 마셔 자살했다고 함.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ㆍ《후한서(後漢書)》89권〈남흉노전〉등 정사(正史)에 기재된 왕소군의 기사는 극히 짧고 야사(野史)에는 각각 다른 설화가 전해지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실(史實)과 다른 이야기들로 윤색되어 역사상의 왕소군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여인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녀는 흉노와의 화친을 위한 정략결혼의 희생이 된 비극적 여인으로 변해 세인들의 애절한 동정의 대상이 되었으며 중국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어 허다한 작품을 출현시켰다.
가장 일찍 출현한 작품으로《소군사(昭君辭)》ㆍ《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있고, 후한(後漢) 채옹(蔡邕)은 《금조(琴操)》를 지었으며 진(晉)나라 석숭(石崇)은〈왕명군사(王明君辭)〉를 작사ㆍ작곡하여 기녀들에게 부르게 해 유명했다고 한다.
이처럼 왕소군을 읊은 시는 모두 약 700여 수가 되고 민간 고사가 약 400여 종, 왕소군의 사적에 관해 글을 쓴 사람이 500여 명에 이른다.
역시 진(晉)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를 지었으며 이백ㆍ백거이ㆍ두보ㆍ이상은(李商隱)ㆍ장중소(張仲素)ㆍ채옹(蔡邕)ㆍ왕안석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한 시를 지었다.
또 둔황[敦煌: 돈황)] 모가오쿠[莫古窟: 막고굴]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해 당나라 말 오대(五代) 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 원곡(元曲) 4대가의 한 사람인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가 최고의 걸작으로 유명하고 현대 작가로는 타이완[臺灣: 대만] 작가 고양(高陽)의 《왕소군》, 곽말약(郭沫若)의 역사극 《왕소군》, 조우(曹禺)의 역사극 《왕소군》 등이 있다.
후허하오터에 있는 왕소군 사당의 전경